일병에서 상병까지
삭막하기만 하던 자대생활도 시간이 흘러가자 어느 정도 적응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아침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총알같이 일어나서 조용히, 그러나 재빨리 옷을 입고는 담요와 매트리스를 정리했다. 침구정리가 끝나면 연병장에 모여서 아침점호를 마치고 바닷가를 따라 7번 국도로 아침구보를 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하나둘셋넷' 구령을 붙이거나 '진짜 사나이', '멋있는 사나이' 등의 군가를 부르며 뛰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1년 이상 매일 아침 동해를 바라보며 구보를 했는데 정작 일출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거다. 해가 뜨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걸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세수를 하고 나서는 아침밥을 먹는다. 그러나 졸병들은 느긋하게 먹을 수 없었다. 선임들보다 먼저 얼른 밥을 쓸어 넣고는 식기세척을 해야 했다. 잔반 처리한 식판들을 산처럼 쌓아놓고는 빨랫비누로 거품을 내어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열심히 설거지했다. 내무반에 돌아오면 혹시라도 어질러진 곳이 있나 확인하고 한 숨 돌리는가 싶으면 오전 8시,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통신병들은 이제야 각자 자기의 주특기와 보직에 따라서 자기 근무지로 향한다.
연대 본부중대의 일과 시간은 약간 회사 같은 분위기였다. 일반 보병부대는 모두들 똑같이 훈련이나 경계근무를 하는데 비해서 연대본부는 행정, 통신, 군수, 수송, 탄약 등의 여러 가지 주특기들이 각자 자기의 영역에서 맡겨진 일을 했다. 통신대는 크게 유선가설과 교환, 무전을 담당하는 무선통신, 타자병, 암호병, 행정병등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사무실이 나뉘어 있었다. 나는 행정병, 그중에서도 통신기계의 부품을 담당하는 수리부속계가 주어졌다. 수 백개의 부속 이름을 외우고, 예하 부대의 통신대에서 요청을 해오면 그 부속을 내주고 서류정리를 하면 되었다. 가끔은 사단 통신 보급대에 들러서 부속을 타오기도 했다. 서류정리와 재고 관리가 좀 귀찮고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사실 업무 자체가 엄청 어렵지는 않았다. 대대 통신장교에게는 적당히 개기면서 부속을 찔끔찔끔 내주기도 했다. 일종의 끗발 부리기 내지는 군기 잡기였다. 비록 일병이긴 했지만 부속 하나라도 아쉬운 대대 통신장교(소위, 중위)들은 부드럽게 친구처럼 나를 대하곤 했다.
정작 힘든 건 내무생활이었다. 언제 선임병들의 지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늘 초 긴장상태로 살아야 했다. 일과가 끝나면 저녁식사, 식기세척, 잠시 숨을 돌리고는 점호준비가 이어진다. 점호야말로 하루 중에 가장 힘들고 무서운 순간이었다. 침상과 내무반 바닥을 깨끗이 청소하고 침구와 관물대를 정리정돈, 각을 잡는다. 개인위생도 관리해야 하니 청결하게 씻고 손발톱도 깔끔하게 깎아야 한다. '군인정신'이니 '군인의 길'이니 하는 선언들도 달달달 외워놔야 한다. 점호시간에 갑자기 물어오면 당황하지 말고 큰 소리로 외워야 하기 때문이다. 뭐라도 꼬투리가 잡히는 날이면 주번사관이 전체 얼차려를 주거나 사정없이 구타를 가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니 저녁 점호는 하루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라가는 공포스러운 시간이었다. 점호가 무사히 끝나고 침상에 누워서 취침나팔소리를 들으면 그제야 하루가 무사히 지났음을 실감하곤 했다.
그런데 점호로 끝나지 않는 날도 있었다. 점호시간에 지적된 내용이 최고참병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혹은 군기가 빠졌다는 지극히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순간, 공포의 집합을 발동한다. 집합, 그건 그냥 사람들이 모인다는 사전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아주 독특하고 지독한 의식이었다. 점호가 끝나고 모포를 까는 순간 아주 은밀하게 집합명령이 전달된다. 순간 모두의 얼굴에 긴장과 공포가 내려앉는다. 올 것이 왔다. 이제 취침나팔소리, '밤하늘의 트럼펫'이 끝나면 조용히, 한 두 명씩 어둠 속으로 빠져나간다. 미리 약속된 장소, CPX교장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불침번과 뻬당 (뻬치카 담당)을 빼고 전부 모이면 먼저 최고참병이 일장 훈시를 한다. 주로 요즘 생활하는 걸 보니 군기가 빠졌다, 그 군기를 좀 잡아야겠다 뭐 이런 내용이다. 그리고는 바로 밑에 병장들은 열외 시키고 나머지는 '엎드려뻗쳐'를 시킨 상태에서 빠따를 친다. 재미있는 건 그 빠따의 소재였다. 들리는 얘기로는 공병들은 곡괭이 자루를, 포병들은 포다리를 휘두른단다. 통신병들은 굵직한 알루미늄 안테나 폴을 썼다. 마치 텐트의 폴처럼 아래위를 연결하는 폴대의 한마디가 빠따가 되었다. 요걸로 엉덩이를 맞으면 짜르르하는 통증이 허리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간다. 아프다고 엉덩이를 틀거나 피하면 잘못해서 허리를 맞게 되고 그러다가 허리 병신 된다고 겁을 주는 통에 아파도 꼼짝없이 빠따를 맞아야 했다. 몇 대를 맞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다섯 대에서 열 대쯤 맞지 않았나 싶다. 한 명에게 맞는 것 말이다. 그 한 명이 끝나면 최고참병은 내무반으로 들어가고 바로 밑 동기생, 그러니까 신참 병장 정도가 빠따를 이어받는다. 그리고 신참 병장의 아랫기수부터 두 번째 빠따를 맞아야 한다. 이렇게 내려오다 보면 맨 막내인 나는 최소한 대여섯 번 이상의 빠따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때로는 세워 둔 상태에서 가슴으로 주먹을 받아 내기도 했다. 심장을 감싸고 있는 쇄골 부분을 주먹으로 때리면 넘어지지 않도록 그 순간에 맞추어 약간의 반동으로 충격을 상쇄해야 한다. 그 힘이 너무 약하면 뒤로 밀리거나 넘어지게 되고 너무 세면 앞으로 넘어지니 그야말로 적당히, 눈치껏 해야 했다. 혹시라도 실수로 배를 가격할 수도 있으니 배에 잔뜩 힘을 주어 내장을 보호하는 것도 필수였다. 그렇게 매타작을 흥건하게 하는 게 바로 집합이었다. 간부들은 그 집합을 알고 있는 듯했으나 모르는 척,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집합은 시도 때도 없이 걸렸지만 대충 이 주일에 한번 정도는 겪어내야 했다. 그런데 구타의 고통보다 심리적인 공포감이 더 무서운 법이어서 이 주일이 다 찰 때쯤이면 조마조마, 은근한 불안감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차라리 집합을 당해서 푸닥거리를 한 번 하고 나서 내무반에 누우면 마음이 편안해서 푹 자곤 했을 정도다.
사실 선임병들은 몇을 빼고는 그리 악하거나 지독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두 세명의 악독한 선임병들이 버티고 있었고 오랫동안 내려온 군대문화가 모두에게 악역을 강요했다. 의지와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이 후임병들을 괴롭혀야 했다는 말이다. 후임병을 구타하는 일은 보통 '교육'이라는 그럴듯한 용어로 포장되었고 후임들을 '교육'하는 일은 긍정적이고 칭찬받을 일로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그 문화가 나 역시 가해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가자 4월 군번인 우리 동기들 밑으로 5월 군번과 6월 군번들이 들어왔다. 그런데 묘하게도 5월과 6월 군번은 동기로 묶였고 그중에는 나와 입대일이 일주일도 차이 나지 않는, 그러니까 거의 입대동기인 사람도 있었다. 동기를 정해주는 것은 언제나 최고참병의 몫이다. 대충 들어오는 인원을 봐서 서너 명 정도씩을 동기고 끊었는데 바로 경계에서 끊기니 이처럼 다소 애매한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 동기들은 가끔씩 5-6월 군번들의 군기를 잡아야 했다. 물론 감정을 실어서 악하게 한 적은 없다. 윗 선임병들에게 책 잡히지 않을 정도로 한 두 번쯤 집합을 했을 뿐이다. 집합을 하고 구타를 하면서도 이건 아닌데, 싶었고 늘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입대 날짜가 5일 차이 나는 경북 청도 출신의 후임병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다. 이 글을 통해서나마 진심이 아니었다고 사과하고 싶다.
훈련소와 통신학교에서 갈고닦은 '위치 이동' 실력은 자대에서 그 수준을 훨씬 올려 절정에 달했다. 그 사연은 이렇다. 하루는 내 사수인 수리부속계 석병장의 장교 방한모가 없어졌다. 햇볕에 말리느라 빨랫줄에 걸어 두었는데, 요걸 다른 내무반 녀석들이 슬쩍 걷어간 듯했다. 서열 2위인 석병장은 참 어이없는 이유로 '집합'을 발동했고 흥건한 매타작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집합이 끝나고 동기생 한 명이 내게 제안해 왔다.
"웅섭아, 내랑 군수 창고 털을래? 군수 창고에 가면 장교 방한모도 있고 군화도 있어. 그걸 훔쳐다가 석병장님 주자"
"아니, 잠겨 있을 텐데 그걸 어떻게 털어?"
"문은 잠겨있지만 창으로 들어가면 돼. 창문에 메쉬로 철망이 되어있거든. 그건 니퍼로 자르면 돼"
통신병들이니 통신선을 자르는 니퍼는 흔했다. 그걸로 철망을 자르고 창을 통해서 들어가자는 거다. 순간 판단이 서질 않았다. 군수창고는 알고 있지만 그렇게 자세하게 관찰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짜릿한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는 건 나와는 멀었다. 어느새 동기생 둘은 따블백과 니퍼를 들고 어둠 속으로 출정했고 무사히 방한모와 가죽장갑, 그리고 전투화까지 챙겨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그 사냥물 중에 우리 손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석병장을 비롯하여 선임병들에게 진상되었을 뿐이다. 문제는 선임병들의 반응이 예상외로 뜨거웠다는 거다. 장교용 방한모는 병사용과는 달리 털이 풍성하고 고급스러웠으며, 장갑은 네 손가락을 함께 넣는 병사용과는 달리 다섯 손가락이 각각 들어가는 폼 나는 검은색 가죽장갑이었다. 군화 역시 달랐다. 재봉선이 있는 사병용과는 달이 앞코가 매끈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멋진 노획품들을 본 선임병들은 너도 나도 주문을 넣었고 동기생과 나는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서 몇 차례 더 원정을 나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막 병장 진급한 점잖은 문병장이 내무반에서 한마디 했다.
"야, 이놈들아. 니들 큰일 난다. 잡히면 빼도 박도 못하고 영창에 신세 조진다. 이제 그만해라"
모두들 모여 있는 내무반에서 한 경고이니 우리 둘에게 했지만 사실은 모든 선임병들에게 한 얘기나 다름없었다. 마침 군수과에서도 눈치를 챈 듯, 창문 철망을 보강한 상태여서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그 문병장의 말 한마디로 우리의 절도행각은 끝이 났고, 나는 나머지 군 생활 중에 더 이상의 '위치 이동'은 하지 않았다. 전남대를 다니다가 입대했다는 동그란 안경을 쓴 문병장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혹시라도 가능하다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도 싶다. 아참, 나와 손발을 맞추었던 공범, 동기생은 신학대를 다니다가 입대한 친구였고 그 후 포항에서 목회를 하다가 청주로 이사 왔고 아직까지도 가끔 만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