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병의 편지

통신학교에서 자대 배치까지

by 심웅섭



논산훈련소를 졸업하면서 새로 받은 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등병 계급장, 달랑 한 개뿐이지만 황금처럼 누런 작대기를 모자와 군복에 턱 하니 달고 보니 제법 뿌듯했다. 두 번째는 주특기, 주특기는 사회로 치면 직업 같은 것인데 군대생활의 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변수가 된다. 내가 받은 주특기는 통신병, 그중에서도 전파통신(CW)이었다. 어렸을 적 보던 간첩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던 장면, 어두운 방에서 무전기를 두드리거나 헤드폰을 쓰고 뭔가를 받아 적을 때 들리던 삐삐 거 리던 소리, 바로 그 모르스 부호를 다루는 게 전파통신이다. 나쁘지 않았다. 일단 소총 메고 뛰는 보병이 아니니 심한 육체적 고생은 없을 것이요, 후반기 교육이 14주로 비교적 긴 편이니 그것도 다행이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논산훈련소를 졸업하면 보통 바로 자기가 근무할 부대(자대라고 한다)로 바로 가게 마련인데 이럴 경우 처음부터 힘든 내무생활을 그대로 겪어야 한다. 그런데 후반기 교육은 따로 군사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으니까 이 기간 동안은 선임병들 없이 동기생들과 지내게 되어 고생이 덜하다는 말이다.

대전 통신학교에 입교를 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3년을 보낸 대전에 다시 온 것이다. 감회는 새로웠지만 어차피 외출을 하는 것도 아니니 대전이라는 실감은 별로 나지 않았다. 통신학교의 분위기는 논산훈련소보다는 자유롭고 재미있었다. 일단 교육생들의 복장과 계급이 다양했다. 나 같은 육군 이등병이 제일 많았지만 해군, 공군에 해병대도 있었고 드물게는 장교들도 교육을 받았다. 육군과 달리 공군 해군 해병대들은 명찰 색깔이나 바지 끝단, 군복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서 획일적인 논산훈련소보다는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교육도 시원한 교실에서 진행됐는데 분위기가 강압적이지 않고 신사적이었다. 한마디로 할만한 군대생활이었다.

통신학교에서의 기억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뜻밖에 모르스 부호를 잘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처음 배우는 부호체계이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히는 기술이었는데 나는 제법 빠르고 정확하게 무전을 보낼 수 있었다. 손으로 뭔가를 조작하는데 특기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두 번째는 나의 위치 이동이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논산훈련소에서 빨래를 위치 이동하고 날치기를 시도했다면 여기서는 좀 더 지능적인 위치 이동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일요일이면 모두들 빨래와 모포, 매트리스를 바깥에 널어놓는다. 일광욕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내무반의 매트리스 한 장이 사라졌다. 점호시간에 이걸 알아낸 구대장이 낮고 짧은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5분 내로 막사 앞에 집합,

완전군장에 알 철모, 전투 복위에 판초우의를 걸친다.

왼쪽 발은 군화 오른쪽은 영내화,

실시!


이게 무슨 의미인지 군대 다녀오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완전군장이란 전투복과 모포등으로 배낭을 꾸려 총과 함께 멘다는 뜻이요, 알 철모라는 말은 철모의 속 모자(화이바라고 부른다) 없이 겉 철모만 쓰라는 말인데 이렇게 하면 철모는 머리에 고정되지 않고 흔들거리거나 떨어지기 십상이다. 판초우의는 비올 때 입는 두꺼운 비옷이니 맑은 날 이걸 입고 뛰면 땀이 비 오듯 흐르게 된다. 신발은 한쪽은 굽이 있고 무거운 군화에 다른 쪽은 납작하고 가벼운 실내 화니 마치 절뚝거리듯이 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복장으로 어두운 숙소 밖에 집합한 우리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구보를 했다. 왼 손으로는 떨어질 듯 덜렁거리는 철모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어깨에 멘 소총 끈을 잡는다. 발은 절뚝절뚝 모자는 흔들흔들 땀은 비 오듯 흐르는데 닦아낼 손도 없다. 그나마 먼 거리를 뛰면 나으련만 크지도 않은 막사 주위를 뱅글뱅글 돌자니 그야말로 어지럼증이 날 정도다. 그렇게 수십 바퀴를 절뚝거리며 뛴 다음, 구대장은 의미 있는 지시사항을 내렸다.


"내일 점호시간에 다시 한번 세어보겠다. "


내일 점호시간에 다시 세어본다는 말은 결국 어디서 훔쳐서라도 채워놓으라는 말과 마찬가지고 채워지지 않으면 이 지긋지긋한 얼차려가 매일 밤 계속된다는 말이다. 모두들 걱정을 하고 있는데 청주 출신의 한 동기생이 내게 제안을 해 왔다.


"웅섭아, 나랑 같이 매트리스를 훔치러 가자"


나는 어이없는 제안에 잠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니 갑자기 어디 가서 매트리스를, 그것도 모두들 깔고 자는 밤중에 훔치자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멍하니 판단이 서지 않는 나에게 그 친구가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했다. 일단 이웃 8중대에 여벌의 매트리스가 한편에 여러 장 쌓여있는 것을 봤고, 게다가 이제 막 입교한 녀석들이니 한번 속여보자는 거였다. 일단 계획은 그럴듯했다. 그러마고 동의했다. 그런데 철저한 이 친구는 내무반의 동기생들에게 재미있는 딜을 시도했다. 둘이서 매트리스를 훔쳐오는 대신 졸업할 때까지 불침번을 빼 달라는 제안이었다. 동기생들은 급한 마음에 그러마고 약속했고 둘은 야밤을 틈타 원정 사기 절도를 나섰다. 캄캄한 밤이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고 조심조심 8중대 막사를 들어서니 불침번이 막아서며 용무를 묻는다.


"야, 너네 구대장님이 우리 중대에 와 계시는데 거기서 주무신다고 매트리스 한 장 들고 오랜다"


내 동기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고 그 불쌍한 신병은 아무런 의심 없이 한 장을 내줬다. 숨죽이며 결과를 기다리던 내무반 동기생들은 의기양양 돌아온 우리를 환호로 맞았고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비록 약속한 불침번 면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지켜지지 못했지만 이로써 둘은 내무반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생각해보니 도둑질 날치기에 이어서 사기까지 배운 셈이지만 어차피 국방부 물건이 국방부 소속 인원에게 속해있는 거라는 생각에 죄의식은 없었다. 오히려 사회에서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경험들이 재미있기까지 했다.


14주간의 전파통신(ROC) 332기 교육을 마치고 각자 자대 배치를 받았다. 자대 배치는 일단 군단 보충대로 배치받고 거기서 다시 사단, 연대식으로 순차적으로 배치를 받는다. 나는 1군단을 거쳐 88 여단 55 연대 본부 통신대로 배속되었다. 아마 2-3일은 걸렸을 텐데, 그 과정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군용 열차를 기다리기 위해서 대전역에서 기다리던 장면은 또렷하다. 마침 추석 하루 이틀 전이었는지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데 어디로 갈지 운명을 알 수 없는 이등병들이 따블 백을 깔고 앉아 목이 터져라 대전 부르스를 불러 댔다. 비록 목포행은 아니지만 열차시간도 밤 12시 부근이었으니 제법 노래 가사와 상황이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0시 50분"


내가 배속된 부대는 속초에서도 한참이나 북쪽에 위치한 간성 부근의 공현진이라는 동네였다. 휴전선까지 닿아있는 전방 부대인 데다가 해마다 각종 사고들이 나곤 해서 모두들 가기 싫어하는 부대였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연대본부의 통신대로 배정됐는데 더 이상 예하부대로 가지 않고 연대본부에 머문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예하부대로 간다는 것은 더 깊은 전방으로 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내가 호랑이 굴에 들어왔음을 깨닫는데 불과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통신학교 동기생 4명과 함께 배속이 됐다. 바짝 군기가 든 네 명은 따블 백을 둘러메고 최대한 직각 자세로 내무반에 들어서서 우렁차게 전입신고를 했다. 내무반은 좁고 긴 창고 같은 막사로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침상이, 침상 위에는 관물대라는 수납장이 똑같은 모양으로 달려 있었다. 그리고 관물대에는 여벌의 군복과 속옷과 양말들이 마치 깎은 것처럼 각진 모양으로 포개져 있었고 위에는 배낭이 야전삽과 항고를 매단채 놓여 있었다. 오래된 막사에 낡은 침상, 각진 관물대에 선임병들의 어두운 미소들까지 모두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함께 전입한 동기생들은 그야말로 초긴장상태로 침상 위에 앉아 있다가 누군가가 "야, 신병" 하고 부르면 "네, 이병 심웅섭"하는 관등성명을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문제는 밤이었다. 점호가 끝나고 잠자리를 펴느라고 어수선한데 말년 김 병장이 나를 불렀다. 군기 바짝 든 소리로 대답을 하니 너는 내 옆에서 자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내가 감히 말년병장 옆에서 자다니. 그런데 다른 선임병들 누구도 이상한 반응이나 표정을 보이지 않는다. 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말년병장 옆으로 자리를 폈다. 성추행이었다. 요즘은 뉴스나 인터넷을 통해서 과거의 교도소와 병영에서의 성추행 사례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전혀 들어보거나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거부할 재간은 없었다. 다음날 점호가 끝나자 말년 김 병장(그 이름과 고향, 야비한 얼굴 표정과 목소리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은 다시 나를 옆자리로 불렀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입에서 짧지만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갔다.


"싫습니다"


순간 내무반이 모두 얼음, 동작 멈춤이 된 듯 싸아해 졌다. 이크, 있을 수 없는 일을 내가 저질렀구나. 말년병장은 어이가 없는 듯,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고는 다시 말했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니? 얼른 내 옆으로 와"


"싫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미 초긴장 상태로 일시 멈춤한 내무반에서 내 목소리는 상상외로 크게 울렸다. 단언컨대 싫다고 외친 사람은 분명 나였지만 내가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덩치도 작고 싸움도 못하는 데다가 마음도 그리 강하지 못한 약골이었다. 어젯밤이 수치스럽기는 했지만 그걸 거부해야겠다고 미리 계산한 적도 없다. 내가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내 입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슴에서 뭔가가 솟구쳐 올라 입을 움직여 소리를 낸 것이다. 이상한 것은 겁이 나기는커녕 마음이 차분해지고 단단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말년병장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짧게 한마디 했다.


"이 새끼들 봐라, 요즘 군기가 완전히 빠져갖고 신병교육도 못 시키고.

야, 병장들 CPX 교장으로 집합"


이게 뭔 말인가 하면 매타작 하기 좋은 으슥한 곳으로 병장들만 나오라는 뜻이다. 줄 빠따를 놓겠다는 말이다. 병장만 모이라고 한 것은 괜히 체면 구기고 힘들게 여러 명 때릴 거 없이 병장들 십여 명만 때리면 자동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일종의 시스템 단추를 누른 것이다. 그 이후는 난 잘 모른다. 그저 병장들이 들어오고 상병들이 나가고, 다시 상병들이 들어오고 일병들이 나가고, 한참 동안 조용한 공포가 지속된 것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신병은 묵계적으로 집합 대상이 아니어서 그날 밤에 구타를 당하지는 않았고 더 이상 나를 성추행하거나 이번 일로 문제 삼는 선임병들도 없었다.


나는 서열 2위, 수리부속계 석 병장의 조수로 간택되었다. 수리부속계는 통신장비의 부속품들을 관리하고 내주는 일종의 부품 배급 담당이었다. 수많은 부속의 이름을 외우고 재고관리를 하고 예하부대에서 요청이 오면 적당히 내주는 일이었다. 일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선임병들의 횡포가 힘들었다. 그런데 성추행을 거부한 나의 꼴통 짓은 일회성이 아니라 고질병이었나 보다. 그 후로도 세 번이나, 나도 이해할 수 없는 힘에 떠밀려 선임병들에게 저항을 했고 나중에는 통신대의 절대권력, 선임하사에게까지 대들었으니 말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련다.

그나마 함께 온 네 명의 동기생들이 큰 힘이 되었다. 우리끼리 선임병들 욕도 하고 PX (군대 매점)에서 빵도 사 먹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한 달쯤 지나서 그중 한 명이 전방에 심리전 소대로 전출을 가서 세명이 되었지만 그 세명의 우정은 아주 오랫동안, 그중의 한 명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빠르게 적응해갔다. 어차피 나는 가진 것도 이룬 것도 미래의 보장도 없는 스무 살이 갓 넘은 젊은 이었으니 적응 못할 나만의 기준이 있지도 않았다. 우락부락 무섭던 선임병들도 알고보니 몇 명을 빼고는 대부분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싱긋싱긋 웃는 뻬당 김상병, 아무 먹은 맘 없이 속을 훌떡 보여주는 화법으로 친근하게 말을 거는 보수계 이일병, 선임 병중에서 아직까지도 유일하게 연락을 하고 지내는 보급계 이일병 등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 부대는 동해바다를 그야말로 코앞에 두고 있었다. 어느정도냐하면 부대 정문에서 몇십 미터 나가면 7번 국도가 지나고 이 도로를 건너서 작은 솔밭을 지나면 바로 해안 모래사장이 나온다. 부대에서도 고개만 돌리면 동해바다가 펼쳐질 정도였고 동해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면서 7번 국도를 따라 아침 구보를 하곤 했다. 내륙지방에서 자라서 바다라고는 한두 번 본 게 다였으니 그 풍경이 참으로 아름다웠을 만 하지만 이상하게도 군대 생활하면서 바라보는 바다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그 부대에 거의 일 년 반쯤 머물렀는데 동해 일출을 바라본 적은 겨우 두세 번 정도, 물론 태양은 매일 떠올랐지만 내 마음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다. 첫 휴가를 대관령을 넘어 돌아오는 길에 동해바다를 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딱 한곡만 꼽으라면 김광석이 부른 '이등병의 편지'다. 김광석 특유의 가슴을 흔드는 목소리도 좋지만 그 가사 하나하나가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3절을 들으면 어느새 40년 전, 공현진의 부대가 떠오르고 나는 엄마가 보고 싶은 빡빡머리의 이등병으로 돌아가 있곤 한다. 수십 번 수백 번 들어도 흐려지지 않는 저린 느낌, 그만큼 남자들에게 군대생활의 기억은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고 살아있다는 말이다.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에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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