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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참맛

은퇴부부의 베트남 자유여행 18

by 심웅섭

여명이 채 밝기도 전인데 새벽부터 눈을 뜬다. 맨 먼저 나를 깨운 것은 벽과 지붕 어딘가를 박박 긁어대는 소리, 그리고 창문 바로 앞 나뭇가지에서 큰 소리로 울어대는 새소리였다. 하, 녀석 소리도 우렁차다. 그런데 좀 멀리 가서 울면 안 되냐, 왜 하필 남의 창 앞이냐? 행복에 겨워 투덜대며 다시 눈을 감는데 이번에는 어떤 녀석인지 꾸구국 꾸욱, 길게 여운을 남기는 제법 굵직한 목소리로 잠을 깨운다.(나중에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니 겍코 도마뱀이란다) 조금 멀리서는 정글에서 들리는 갖가지 새소리, 그리고 긴팔원숭이의 화려한 노랫소리(gibbon singing)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오오오오오, 오잇 오잇 오잇' 원숭이 소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노래하듯이 울어대는 녀석들. 이런 상황에서 더 자겠다고 눈을 감는 건 별로 승산이 없는 일이다. 늦게 잠든 아내를 깨울까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오니 푸른 동나이 강이 어젯밤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잠시 가슴을 펴고 강과 대나무 숲을 바라보며 이 순간을 느껴본다. 원숭이의 노랫소리와 신비스럽게 푸른 동나이 강이 하나처럼 느껴진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그 천국에도 아침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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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일어났다. 어제부터 계획한 장구경을 나설 참이다. 숙소에서 몇백 미터 걸어가면 집들 사이로 제법 넓직한 공터가 있다. 그런데 어제 저녁 쌀국수집 아주머니에게서 이 텅 빈 장터에서 매일 아침 장이 열린다는 고급 정보를 얻었다. 크지도 않은 동네, 폐허같은 그곳에 장이 열린다니 궁금하기 짝이 없다. 주섬주섬 가방을 메고 나선 시간이 아침 7시, 그런데 장터에 도착한 순간 우리 부부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제저녁만 해도 휑하니 비어서 폐허처럼 느껴지던 장터에 거짓말처럼 수많은 상인들과 주민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도깨비 시장이라더니 이거야 말로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도깨비 시장이다. 골라 골라를 외치며 옷과 양은그릇을 파는 상인들, 각종 과일과 채소와 고기들을 늘어놓고 파는 상점들, 그 사이로 쌀국수와 간식거리를 파는 노점상들까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 눈을 잡아 끄는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생선들이다. 가까이에 동나이 강이 있으니 민물고기가 풍성하리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정말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나와있다. 메기에 잉어에 장어, 톡톡 튀는 민물새우에 황금색 잉어까지...... 재미있는 것은 민물고기가 모두 살아 있다는 거다. 아침에 막 그물에서 건졌는지 아직도 누워서 아가미를 뻐끔거린다. 자세히 보니 그냥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게 아니라 얕은 그릇에 물을 자박하게 부어 놓았다. 고기들이 누워서라도 아가미호흡을 할 수 있게 말이다. 눈으로 보기에는 장꾼들보다 상인들이 더 많아 보여서 과연 그 생선들이 다 팔릴 것인지 살짝 걱정도 되지만, 오히려 상인들은 태평스러운 얼굴로 수다들을 떨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싱싱한 물고기를 사다가 소금 설설 뿌려서 구워 먹으면 좋겠는데, 숯불도 석쇠도 없는 우리 부부에게는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어서 구경만 하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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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우리 부부가 용감하게 산 게 있다. 바로 큼직한 열대과일, 잭 프룻이다. 잭 프룻은 베트남에 오자마자부터 여러 번 사 먹었다. 처음에는 주로 마트에서 1kg쯤 소분해서 파는 것들을 3만 동쯤에, 그리고 나중에는 길거리에서 반으로 나눈 놈을 kg당 2만 동씩에 사 먹기도 했었다. 오늘 장터에서 처음으로 통째로 사 볼 참이다. 큼직한 잭프룻을 통째로 파는데 대충 봐도 무게가 10kg은 넘겠다. 가격을 물으니 8만 동이란다. kg으로 치면 1만 동도 안 되는 가격이니 우리가 사 먹던 가격에 비하면 절반 이하다. 냉큼 사서 커다란 여행용 소가죽 가방에 넣으니 어깨가 묵직하다. 아내는 가방끈을 걱정하지만 나는 어깨와 허리가 걱정이다. 문제는 이걸 잘라먹을 칼이 없다는 것, 바오록에서 상인이 파는 것을 보니 큰 칼로 과일을 팔 분의 일로 나누어 껍질을 알맞게 저며내고, 속에 생긴 심을 삼각형으로 따내야 한다. 그 해체 과정은 눈여겨봤으니 해봄직 한데 문제는 큼직한 칼이 필요하다. 여행자인 우리 부부에게 망고를 깎기 위한 과도가 하나 있긴 하지만 이걸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숙소 주방에서 빌릴까 고민하는데 아내가 그냥 칼 하나를 사잔다. 마침 옆에 철물점이 있기에 보니 단돈 25,000동, 천 삼백 원이다. 그래, 두 번만 쓰고 숙소에 기증해도 되겠구나 싶어서 칼까지 장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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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과일은 충분한 듯싶은데, 그만 내 눈길이 바나나에 머물렀다. 한국에서도 익히 보아온 손가락만 한 몽키 바나나다. 직접 나무에서 딴 싱싱한 몽키 바나나는 무슨 맛일까 궁금해하는 나에게 아주머니가 사라고 재촉한다. 얼마냐고 물으니 말이 안 통하는 나에게 만 동짜리 지폐를 갖다 붙이며 활짝 웃는다. 세상에나, 바나나 세 송이에 겨우 500원이란다. 이걸 사면서 기쁜 게 아니라 살짝 미안한 걸 보니 아직은 내게 양심이 살아 있는 모양이다. 알록달록 손가락처럼 예쁜 떡도 사고 시원 걸쭉한 쌀국수로 아침을 먹는다. 불과 만원 남짓에 커다란 잭프룻에 칼에 간식거리, 거기에 맛있는 쌀국수까지......, 한국에서는 여유 없는 백수가 이곳에서는 맘껏 호사를 누린다. 웬만한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다.


물건 값도 싸지만 사람들의 표정과 장터의 분위기 또한 유난히 밝다. 이 장터에서만 느껴지는 이 활기와 훈훈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일단 우리 부부가 짐작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로 이 장터에 나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현지인이다. 공산품을 떼다가 파는 상인들도 있지만 농산물과 고기류, 생선을 파는 사람들은 모두 농부나 어부라는 말이다. 크지도 않은 시골 동네에 뻔히 얼굴 아는 이웃들끼리 각자 생산한 물건들을 가져와서 장터를 열었으니, 어찌 보면 매일 아침 열리는 장터가 이들에게는 이웃을 만나는 시간이며 일상의 축제가 아닐까? 조금 전 본 풍경만 해도 그렇다. 조금 한가한 틈을 타서 아주머니 셋이 닭싸움을 벌이며 깔깔거리고,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은 또 응원하면서 깔깔거린다.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가 밝은 것으로 보아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 반짝하고 열리는 것도 시장의 활기를 더해주는 것 같다. 오래가는 장작불보다 반짝 사라지는 불꽃놀이가 더 화려한 법, 하루 종일 지루하게 앉아서 파는 게 아니라 잠시 후 사라지는 새벽시장이니 더 활기차고 반짝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결정적인 이유가 있으니 그건 바로 젊은이들이 많다는 거다. '시골장터'하면 의례 할머니와 나이 드신 아주머니 아저씨를 떠 올리는 우리와는 달리, 이곳 장터에는 젊은이들이 많다. 아니 이곳 장터뿐 아니라 베트남의 시골에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해야겠지. 초등학교 중학교 또래의 아이들도 많고 아가씨와 청년들도 귀하지 않다. 젊은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좌판에 주저앉아 물건을 팔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질주한다. 장터가 만들어 내는 묘한 활기의 상당 부분이 이들의 젊음이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도 50년 전만 해도 이런 모습이었는데, 부럽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핀 드리퍼로 베트남 커피를 내려 마시고는 숙소 앞 전망대에 앉아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동나이 강을 바라본다. 심심하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가끔씩은 SNS로 지인들을 약 올린다. 출출해지면 열대과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사과, 잭프룻, 바나나에 망고까지, 열대과일들이 줄을 서서 주인님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다. 맥주가 생각나면 600원짜리 사이공 맥주가 대기하고 있고 배가 고파지면 1,800원짜리 소고기 쌀국수가 지천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함이 없다.


사람들은 관광, 혹은 여행을 하면서 어떤 즐거움을 찾을까? 어떤 이들은 신기한 절경들을, 어떤 이들은 역사 유적들을, 또 어떠 사람들은 골프나 다이빙등의 액티비티를 즐긴다. 맛있는 음식은 기본이고 음악이나 춤등의 공연도 빠질 수 없는 여행의 즐거움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계획과 비용지출이 필요하다. 패키지나 관광회사를 통해 관광상품을 구매해야 하고 깔끔한 숙소에 수준 있는 식사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퇴백수인 우리 부부의 여행패턴은 좀 다르다. 가능하면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자로, 도시가 아니라 소도시나 시골로,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현지민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서 소소한 체험과 일상을 즐기고자 한다. 물론 은퇴백수가 해외여행, 그것도 장기여행을 계속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깟띠엔에서 느끼는 소소한 재미들은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허접한 행복이 아니다. 값비싸고 화려한 그 어느 여행보다도 나를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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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동네 산책에 나섰다. 오늘은 구름도 약간 끼고 바람이 선들선들 부니 대낮에도 걸을만하다. 숙소를 나서서 동네 골목으로 접어든다. 오래된 집들도 대부분 잘 정리되어 있고 집 안팎으로 알록달록 꽃들이 피어 있다. 멋진 소리로 울어대는 새장을 가진 집들도 많다. 조금 더 걸어가니 집들이 점점 띄엄띄엄 해지면서 과수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로 잭프룻 나무들이 많고 두리안, 자몽, 파파야, 레몬나무도 있다. 잡초도 잘 정리되어 있고 군데군데 관수시설이 갖추어져서 제법 잘 사는 나라의 느낌이 든다. 평화롭다. 컹컹 짖는 똥개도,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는 어미닭도, 가끔씩 눈치를 보며 휙 지나가는 고양이도 모두 정겹다. 골목길로 대자리를 파는 상인이 '대자리 사세요'를 외치고 지나가고 (이제 이 정도 베트남어는 그냥 알아듣는 정도가 됐다^^) 아이들은 마당 안 해먹 위에서 편안하게 뒹굴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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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벗어나니 사탕수수와 넓은 옥수수 밭이 나타나고 조금 더 걸으니 동나이 강이 시원한 바람을 안겨준다. 오래된 거룻배와 낡은 목선이 강바람에 일렁거린다. 잠시 배에 걸터앉아 강을 바라본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유명하지 않은 시골길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맛보며, 적당한 낯섦과 익숙함의 사이에서 우리 부부는 행복한 백수여행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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