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부부의 베트남 한 달 여행 19
1월 7일, 어제는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오늘은 구름만 끼었다. 정글투어에 딱 좋은 날씨다. 오늘은 좀 더 색다른 방법으로 정글에 접근하기로 했다. 바로 정글 라이딩이다. 이곳 남깟띠엔 국립공원을 즐기는 투어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새벽 네시 반에 모여서 숲으로 들어가서 긴팔원숭이의 합창을 듣는 gibbon singing tour가 있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그렇게 일찍 일어날 자신도 없고 그들의 합창이 숙소 침대에서도 잘 들리니 굳이 숲 속 원숭이들의 터전까지 들어가서 들을 생각은 없다. 물론 만만찮은 투어비도 은퇴백수에겐 부담스럽다. 악어가 사는 호수까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투어도 있다. 요건 좀 해볼 만하다 싶어서 가격을 보니 점심 식사 포함해서 일인당 165만 동, 한국돈으로 치면 9만 원이 약간 넘는 돈이다.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백수의 장기 여행에는 부담되는 금액이다. 그래서 세 번째 옵션을 선택한 것이 바로 정글라이딩이다.
아침을 느지막하게 먹고 베트남 커피를 핀드립으로 내려 마시고 숙소를 나선다. 숙소에서 5분만 걸으면 국립공원 입구다. 입장료는 일인당 6만 동, 입장료에 강을 건너는 뱃삯을 포함한 금액이다. 폭이 100m 남짓한 크지 않은 강이지만 다리가 없으니 꼭 배로 건너야 한다. 배는 손님이 있으면 수시로 왔다 갔다 하니까 오래 기다릴 염려는 없다. 배에서 내려 자전거 임대소를 찾아 100m쯤 내려갔다. 임대료는 한 시간에 3만 동, 4시간에 10만 동, 8시간에 15만 동이란다. 악어호수까지 15km라니 왕복 네 시간이면 될 듯싶어서 4시간에 두대, 모두 20만 동을 내고 빌렸다. 더 이상 필요한 건 없다. 배낭에 생수 한 병과 미니 바나나 한송이, 그리고 만일을 대비한 비옷이 오늘 정글 투어의 준비물 전부다.
정글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일단 걷기만 하다가 높다랗게 자전거 안장에 앉으니 시야가 확 트인다. 내 키가 160cm, 지금 평소보다 20cm쯤 눈높이가 올라와 있으니 고작 180cm라는 건데 이렇게 시야가 확 트이다니 놀랍다.
"여보, 키가 180cm인 사람은 매일 이런 세상을 보고 사는 건가?"
아내도 모를 질문을 실없이 던진다. 내가 머무는 숙소도 숲 속 방갈로이건만, 정글 속에 들어오니 공기부터 다르다. 약간 더 차금차금하고 시원한 느낌, 적당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느낌이다. 며칠 전 알게 된 퉁(tung) 나무와 타고 (tung) 올라간다는 피커스(ficus), 그리고 작은 가지에 가시를 잔뜩 매달아 몸을 감싼 가시 대나무들이 반갑다. 이미 한 번 만난 사이, 친구까지는 아니지만 구면 아니신가. 은근한 향기들이 슬쩍슬쩍 코를 스친다. 눈을 들어보니 길가에 여러 가지 예쁜 꽃들이 지천이다. 개망초를 닮은 하얀 작은 꽃들과 자귀풀처럼 생긴 보라색 꽃은 베트남 어디서나 눈에 띄는, 일종의 기본 꽃이다. 거기에 노란색과 자주색의 으아리를 닮은 소담한 꽃이 눈을 끈다. 궁금하여 자전거에서 내려 사진으로 담았다. 그런데 사진을 찍고 돌아서려다가 우연히 신발을 보니 작은 녀석 하나가 꼬무락거린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불길함, 거머리다. 첫날 정글투어에는 가이드가 덧신과 기피제까지 준비해 줘서 아무 피해 없이 넘어갔지만 오늘은 아무런 보호수단 없이 덜렁 정글에 들어왔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혹시나 싶어서 풀밭에서 나와 양말을 벗으니 그새 세 녀석이 바짓가랑이와 양말목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 허허, 이거 시작부터 헌혈할 뻔했군, 털어버리고는 자전거에 올랐다. 이 소식을 얼른 앞서 간 아내에게도 알려줘야 할 것 같다. 다행히 아내는 아직 거머리의 습격을 받기 전이다. 일단 경계경보를 발령한 상태에서 자전거에 오른다.
뒤에 오던 아내가 갑자기 나를 부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돌아가 보니 나무 위를 바라보며 원숭이가 있단다. 자세히 보니 높이 20m쯤 되는 나무 위에 원숭이 모자가 앉아 쉬고 있다. 꼬리는 흰색이고 털도 중간중간 흰색이 보인다. 카메라를 꺼내는 데 슬그머니 나뭇가지를 타고 자리를 피한다. 하긴, 너무 이른 아침시간에 숙녀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실례겠구나. 어쨌든 동물원이 아닌 숲 속에서 원숭이와 아침인사를 했으니 괜찮은 시작이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커다란 퉁(tung)나무 세 그루가 덩굴을 몸에 건 채 길 옆에 서 있다. 그중 한 그루는 아랫부분이 불룩해져서 마치 목이 긴 타조를 연상케한다. 잠시 내려서 덩굴을 잡고 타잔 흉내를 내며 사진을 찍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원두막처럼 생긴 쉼터가 보이고 인부로 보이는 남자 세 명이 앉아서 쉬고 있다. 악어 세 마리 그림과 welcome이라고 쓰인 입간판도 보인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여기서부터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걸어서 가란다. 리셉션에서 미리 25만 동을 내라는 말과 함께 잘못하면 100만 동에서 500만 동까지 벌금을 매긴다는 안내문이 영어로 쓰여 있다. 그렇다면 여기가 그 악어 호수인가 싶어서 자전거를 세우고, 쉬고 있는 남자들에게 물으니 5km를 더 가야 한단다. 그럼 악어그림은 무어란 말인가 싶지만 현지인의 말을 의심할 수는 없다.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이제부터는 시멘트 포장이 끝나고 비포장 흙길이다. 그런데 어제 비가 온 탓에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거나 진흙길이 나타난다. 그런데 몇 번 시행착오를 겪고나서야 진흙탕을 통과하는데는 약간의 요령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적당한 속도로 들어서서는 페달과 핸들을 고정한 채 얌전히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른 벗어나려고 페달을 밟다가는 핸들이 움직이면 자칫 미끄러지며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마조마 라이딩을 하다 보니 이 자체가 정글 어드벤처구나 싶다. 아슬아슬 재미있으면 어드벤처지 뭐 비싼 기구나 탈 것을 이용해야만 어드벤처는 아니지 않냐 말이다.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진흙 위에 앉아 있다가 우리 부부가 다가가자 후루룩 날아올라 2-30m 앞의 길에 다시 내려앉는다. 다시 다가가면 다시 날아오르기를 몇 차례, 이 녀석이 진흙 속에 무슨 먹이를 찾나 싶지만 그냥 우리 길을 안내하려는 가이드로 해석하기로 한다. 문득, 이 순간의 나와 아내를 느껴본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정글 길을, 은은한 향기와 낯선 나무들의 인사를 받아가며 자전거로 달린다. 날씨는 9월 중순 정도, 모자를 쓰고 반팔소매를 입은 차림에 춥지도 덥지도 않고 딱 좋은 정도다. 가끔씩 이름 모를 새들과 원숭이가 얼굴을 내 밀고, 내 몸은 오랜만의 라이딩으로 깨어나는 중이다. 적당한 다리 근육의 긴장감과 살짝 가빠지는 호흡이 내가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대로 정글과 함께가 되어도 좋겠다. 아, 좋다. 내가 아내와 함께 정글사이로 자전거를 타다니, 평생직장 생활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힘들고 지루한 일상의 끝에 어쩌다가 주어지는 달콤한 휴식의 시간을 지금 이곳에서 느끼고 있구나, 온몸에 기쁨의 전율 같은 것이 찌르르 흐른다. 행복하다.
정글 사이로 두 시간째 달린다. 아무리 천천히 달렸어도 이쯤이면 악어호수가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길은 숲을 벗어나는 느낌이다. 마침 고기를 잡으러 가는 두 명의 현지인을 만나서 물어보았다. 이미 지나쳐 왔으니 돌아가란다. 이상하여 자세히 물어보니 아까 악어그림 있는 곳이 맞단다. 거기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5km를 걸어가야 한단다. 그럼 아까 세명의 남자들이 말한 5km가 걸어서 가는 거리란 말이로구나. 그렇다면 엉뚱한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는 우리 부부에게 한마디라도 해주지 그랬나, 조금 원망스럽긴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돌린다. 다시 악어 호수로 가야 하지만 문제는 점심이다. 다시 뒤돌아 가서 자전거를 세우고 악어 호수에 도착하면 오후 두 시는 될 텐데, 바나나 몇 개로는 버틸 자신이 없다. 그런데 아내가 먼저 제안을 한다.
"여보, 우리 악어 호수에 가지 말자."
"아니, 왜?"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우리 태국에서 코끼리 쇼니 악어 쇼 봤잖아, 전부 동물학대 아냐? 여기 악어들도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좋아 할리는 없으니 결국은 크게 봐서 동물학대잖아?"
하이고, 아내가 이렇게 예쁜 생각을 하다니, 이럴 때는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마침표를 찍어줘야 한다.
"그래, 그러지 뭐. 더군다나 걸어서 5km라니 거머리도 붙을 테고. 대신 오다 보니 hundreds ficus라고 쓰여 있던데 거기나 들렀다 가자. 무슨 나무 같아"
씩씩하게 자전거를 되돌려 오다가 갈림길을 타고 잠시 달리니 뜻밖의 풍경이 나타난다. 나무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하나가 되어 물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을 만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딱 그거다. 자세히 보니 물 가운데 자라는 이 녀석은 가지가 다시 물로 들어가서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서 다시 나무가 자라는 방법으로 버티고 사는 녀석이다. 그러다 보니 마치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어깨동무를 한 듯 뒤 엉켜 있는 모습이 아주 낯설고 살짝 괴기스럽다. 물을 보니 마치 샘물처럼 투명하다. 근처에서 대량의 물이 샘물에서 나오지 않는 이상, 나무의 자정작용이 만든 결과일 것이다. 베트남 정글에는 참으로 기기묘묘한 나무가 사는구나.
시멘트 벤치에 앉아 물과 바나나로 잠시 허기를 채운다. 갑자기 거머리 생각이 떠오른다. 혹시나 싶어서 양말을 벗어보니, 아뿔싸 언제 들어갔는지 또 두 마리가 떨어진다. 다행히 피가 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물기 전이다. 아내도 양말을 벗는데 벌써 발에 피가 묻어난다. 두 군데나 공격을 당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중간에 타잔흉내를 내며 사진을 찍느라고 잠시 포장길을 벗어난 게 떠오른다. 풀도 없는 마른 땅이었는데, 어느새 거머들이 기어올랐나 보다. 돌아오는 길에 오픈트럭을 타고 투어에 나선 사람들을 여러 번 마주쳤다. 길이 좁으니 그때마다 자전거에서 내려서 기다려야 한다. 그때마다 '신짜오'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마음은 좀 복잡하다. 이 좋은 정글라이딩을 경험하지 않고 차로 휙하니 갔다 오는 게 약간 불쌍해 보이는 것이다. 차 위에서 우리 부부를 바라보는 눈들은 우리를 불쌍해할까, 부러워할까?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자전거를 반납하고 부근의 식당에 들었다. 해물 볶음밥이 10만 동, 현지 식사비로는 약간 비싼 편이지만 우리 돈으로는 5,800원 정도니 따지고 보면 부담 없는 가격이다. 매운 고추에 간장을 부어 만든 소스를 살짝 뿌려 맛나게 먹고 코코아 주스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 정도로 정글투어를 마무리하기에는 2%가 부족했다보다. 정글투어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할 짜릿한 체험이 마지막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갑자기 왼쪽 발목에 은은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다. 혹시나 싶어서 신발을 벗어보니 발목 부분에 두 군데나 피에 젖어 있고, 제법 통통해진 거머리 두 마리가 양말 위에서 느긋하게 몸을 뒤척이고 있다. 젖은 걸로 봐서는 양말을 뚫고 빨대를 꽂은 것이 아니라 양말 위에서 빨았다는 건데, 그 조그만 녀석이 어떻게 이런 힘이 있을까 놀랍다. 아마 차를 피하느라 잠시잠시 길에 내려 선 사이에 올라탔나 싶다. 냉큼 떼어내긴 했지만 이번에는 괜히 다리 여기저기가 근질근질한 것 같다.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이리저리 살피며 생각해 보니 이것도 평생 하기 힘든 경험이지 싶다.
저녁 6시, 숙소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쉬려는데 갑자기 노랫소리가 떠들썩하게 확성기를 통해 울린다.
"어, 6시 되니까 시작하네. 우리도 한번 가볼까?"
늦은 점심 덕에 저녁을 거를까 고민 중인데 아내가 제안을 한다. 이웃집 잔치에 슬그머니 끼어 보자는 거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앞집에 어제부터 흰 천막이 쳐지더니 조금 전에는 음식까지 차리고 있었다.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결혼 잔치다. 은근히 궁금하긴 한데, 남의 잔치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가도 될까 싶어서 망설이던 차였다. 그러나 아내가 슬쩍 들이미는데 물러 설 수도 없다.
"그래? 그러지 뭐. 아예 저녁까지 해결하자"
잔칫집 마당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고 동그란 테이블에는 알 수 없는 음식들이 그득하다. 갑자기 들어가면 검문에라도 걸릴까 소심한 마음에 주최 측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서 들어가란다. 옳다구나, 낯선 사람들 틈에 주저앉았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는 베트남 청년들이 대 여섯 명,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부의 여자친구들과 신랑의 남동생, 그리고 그의 친구가 함께 앉았다. 자박한 국물의 전골도 있고 고기와 채소를 섞은 샐러드도 보인다. 샐러드를 먹고 있는데 신부 친구가 나에게 작고 동그란 쌀과자를 내민다. 자세히 보니 모두들 샐러드를 쌀과자 위에 올려서 먹는다. 신랑 동생이 페트병을 열어서 희뿌연 액체를 작은 유리잔에 따라 권한다. 뭐냐고 물으니 라이스 와인이란다. 쌀로 빚은 술, 우리나라로 치면 막걸리라는 건데, 색깔이 투명에 가까운 걸로 봐서는 증류주다. 입에 넣어보니 약간의 화기에 증류주 특유의 향이 먹을 만하다. 도수를 물어보니 40도란다. 그러나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 잘해야 30도 안팎일 듯 싶다. 어쨌거나 젊은 친구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8잔이나 마셨다. 술이 약한 나로서는 좀 과한 양이다. 술은 내가 마셨는데, 아내가 더 재미있어하는 눈치다. 처음에 잔칫집에 가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사실 아내는 아무 데나 들이미는 성격이 아니다. 그런데 3년 전 스페인 두 달 여행에 이번에 베트남 한 달까지, 해외여행이 길어지면서 배짱이 늘었나 보다.
오늘은 우리 부부가 남깟띠엔에서 맞는 마지막 밤이다. 6박 7일간의 꿈같은 시간을 끝내고 떠나려니 자칫 울적할 뻔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베트남 소주까지 마시니 고맙기 그지없다. 신랑 동생에게 축의금을 낼 수 있냐고 물었다. 오늘은 안 받고 내일 결혼식에 받는단다. 다음날 아침, 결혼식이 열리기 직전에 숙소를 떠나면서 축의금을 두둑하게 쾌척했다. 백수로서는 만용을 부린 셈이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결혼 축하사절로 참석한 마당에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