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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Mar 20. 2023

이완용 직격 인터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이완용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머릿속에 어쩌면 가장 악질적인 민족 반역자로 남아있는 그가 살아 있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할까, 매국노라 불리는 그에게도 나름의 타당한 논리와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말이다. 일종의 '역사 뒤집어 보기' 같은 흔한 발상이요 예비작가의 습작이니 왜 하필 지금이냐, 누구누구를 빗댄 것 아니냐 등의 시비는 좀 자제해 주길 부탁드린다. 내가 무슨 환령법 같은 도술을 부리지는 못하는 관계로 망자와의 인터뷰는 부득이 작가적 상상력이라는 특단의 방법을 동원했음을 미리 밝힌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객관적인 인터뷰를 위해서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아, 네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느낌이 괜찮다. 어쩜 품격이 있는 인터뷰가 될 것 같은 예감^^)


선생께서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민족 최고의 반역자, 매국노로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저의 순수한 의도와 민족을 위한 미래지향적 선택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조금이나마 바로 잡고 싶은 게 제가 오늘 인터뷰에 응한 이유입니다.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탁월한 선택이라.....,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 네, 그걸 말씀드리기 위해서는 20세기 초반,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서와 세계사적 흐름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조선은 전 지구를 식민지화하고자 하는 서양 열강들의 경쟁적인 탐욕에 의해 그야말로 풍전등화였습니다. 힘을 갖추지 못한 조선으로서는 어차피 누군가에게 먹히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나마 우리와 가장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많을 것을 나눈 나라, 일본이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이요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식민지가 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스스로 근대화를 하면서 국력을 기르는 등의 방법 말입니다.


그것은 말하기 좋아하는 후세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일본에게 우리나라를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게 제 판단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조선왕조가 이미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받아들이거나 이끌어 가기에 너무 낡았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국가의 근본이념인 유교는 양반과 상놈을 가르고, 노론과 소론을 가르고, 남자와 여자를 가르면서 정치는 사람들의 행복이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분을 내세운 밥그릇 지키기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일부 양반을 제외한 많은 민중들은 국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왜 왕을 위해 충성하고 양반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떤 의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유약한 왕조는 어떤 개혁 의지도 없이 그저 자리 지키기에 연연하여 우왕좌왕,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집안싸움에 나라의 운명이 들썩들썩했고요. 일부 개혁파가 나서서 외국 문물을 받아들여서 국력을 키우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책상물림들의 놀이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고 국가가 부강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거든요. 이런 판단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같은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윽,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이완용은 천하의 나쁜 놈일 것이라는 내 선입견이 순간 흔들린다. 곧게 앉은 자세와 반듯한 얼굴, 그리고 카이제르 수염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음에 걸린다. 거기에 인터뷰에 응하는 태도도 당당하고 논리가 제법 탄탄하니 어쩌면 내가 설득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렇군요. 그런데 당시 많은 조선의 민중들은 그런 선생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뭐 안타깝긴 하지만 그렇습니다. 제가 두고두고 욕을 먹는 것도 결국 그 때문이고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민중들의 군중심리에 의존해서 민족의 진로 같은 엄청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선택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지닌 사람들, 그러니까 학식과 자격을 갖춘 지식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서양의 민주주의에서는 대통령이라는 이름의 왕을 스스로 뽑는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민중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왕을 그들이 뽑았지만 그 왕의 선택을 받아들이며 사는 게 민중들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민주주의라는 말은 일종의 말장난, 심하게 말하자면 사기에 가깝지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은 없습니다. 양들이 스스로 양을 몰고 다니지는 않거든요. 결국 양치기나 목양견의 지시를 따르는 게 양, 민중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민중들의 의견이라는 게 분위기에 따라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들쥐들의 습성과 닮았거든요. 전혀 믿을 바가 못됩니다. 민중은 그저 통치와 계몽의 대상일 뿐이지요.


 민중들의 정서와는 다른 판단을 하는 게 지도자다, 다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한일합방으로 인해서 우리 민족은 36년간 온갖 고통과 수탈에 시달려야 했고, 해방된 이후에도 100여 년이 넘도록 식민지배로 인한 후유증으로 분열을 경험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성급한 판단입니다. 한일합방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활발하게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일부 용기 있는, 나의 뒤를 잇는 통치자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지켜봅시다.


그렇지만 식민지배를 통해서 온갖 수탈과 차별과 투옥과 고문과 살인 등의 반인륜적인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우리나라가 힘이 없으니까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국제정서는 물론이고 인간사, 아니 모든 만물의 기본 원리는 약육강식이에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잡아먹는 것은 자연의 이치요, 진보의 첫걸음입니다. 일본의 잘못이 아니에요. 따라서 그걸 미안해하거나 사죄할 일도 물론 아닙니다.


이거, 뭔가 선생의 말에 모순이 느껴집니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한 탁월한 선택이라면서 동시에 일본의 가해 행위는 정당하다는 말은......,


모쪼록 애국적인 결단, 미래를 향한 통 큰 결심에는 다소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영특한 지도자의 외로운 결단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흥하든 망하든 일단 꼴리는 대로 내질러 보는 약간의 동물적인 무모성도 지도자의 덕목 중 하나거든요.


(갑자기 속된 표현들이 나오는 걸 보니 뭔가 흔들렸나 보다. 날카로운 질문으로 파고 들 절호의 찬스다)


결국 애국적이니 미래지향적이니 하는 거창한 논리를 내세웠지만, 선생의 결단이라는 게 동물적인 욕망과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나온 죄악이라는데 스스로 동의하시는 거네요?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린다. 평정심을 유지한 척 애쓰는 모습, 제대로 흔들었나 보다)


역사가 말해 줄 겁니다. 언젠가 나를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탁월한 후손들이 나올 겁니다. 그 소수의 탁월한 후손들에 의해서 역사는 바로 설 겁니다. 민중들이 동의하느냐 아니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매한 민중들의 군중심리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시시때때로 바뀌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그런 민초들을 무시할 수 있는 단순 무식함, 그걸 갖춘 훌륭한 지도자가 언젠가는 나올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느끼는 게 있다. 어쩌면 역사는 진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비틀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뒷걸음질도 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100년 전에 죽은 사람과의 인터뷰가 이리도 생생한 현실감을 지닐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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