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임곡리를 처음 만난 것은 4년 전, 속리산둘레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우선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가 눈에 띄었다. 수령 350여 년의 노거수가 아직도 마을을 지켜주는 듯, 단아하면서 당당했다. 당산나무를 지나 나타난 마을의 첫인상은 편안하면서 신비스러웠다. 천택산의 품 안에 안겨 구병산을 한눈에 바라보는 데다가, 외부와는 제법 떨어져 있어서 느껴지는 편안함이리라. 거기에 오래된 비밀을 간직한 듯한 흙집들과 감나무 위로 펼쳐진 파아란 하늘, 그리고 유난히 따사로운 햇살은 묘한 신비감을 만들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곳이 분단마을이라는 점이다. 동네 한가운데로 흐르는 조그마한 실개천을 경계로 한쪽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이요, 반대쪽은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이다. 크지도 않은 시골마을에 이장도 두 명, 마을회관도 두 개이며 버스도 상주와 보은에서 각각 하루 세 번씩 들어온다. 경계를 따라 주민들의 출신학교도 갈라졌다. 처음에는 모두들 관기국민학교를 다니다가 60년대의 어느 시기에 상주시 화남면에 평원초등학교가 생기면서 같은 마을 동무들이 이산가족이 되었단다.
임곡리는 진주 강 씨 집성촌인 윗말과, 인동 장 씨 집성마을인 아랫말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때는 170여 호를 자랑하는 커다란 마을이었단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나뉜 데다 성씨가 다르고 보니 주민들 사이에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을 법 하지만, 정작 충북과 경북을 나누는 일은 없었단다. 윗마을의 주민 한분에게 물어보니 옛날에는 충북(그래야 개울 하나 건너지만)에 있는 우물물을 함께 먹었고 마을 행사나 대소사도 구별 없이 함께 했단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지금, 얼마 남지 않은 주민들은 윗말과 아랫말, 경북과 충북의 구분 없이 하나의 마을회관에 모여서 같이 웃고 함께 밥을 먹는다.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마을이 두 개로 나뉘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마을 주민에게 물었으나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관료들의 탁상행정 탓일 거라는 추측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런 임곡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다. 첫째는 행정구역이라는 인위적인 분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삶은 나뉘지 않았다는 점, 이는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 모두에게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두 번째는 200여 km에 달하는 속리산 둘레길이 충북과 경북을 넘나들며 이어지는데 유독 이 마을은 양쪽 도에 걸쳐있어 상징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혹자는 길을 두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따지지만, 길은 어디로든 가고 싶은 인간의 본능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이어지게 마련이니 도계 따위의 인위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래저래 임곡리는 마음이 끌리는 동네였다.
그런데 최근 이곳 임곡리에 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시작은 이른 봄부터였다. 처음에는 외지인들이 자리 잡으면서 벽화를 그리고 꽃도 심기 시작했다. 곧이어 둘레길 주변에 솟대와 조형물이 세워지고 지나는 이에게 무료로 음료수를 나눠주었다. 궁금해서 연유를 물으니 그저 마을을 찾아주는 이들이 고마워서란다. 필자도 둘레길을 점검하기 위해 마을을 지나다가 두어 차례 공짜 음료수를 얻어 마시기도 했다. 둘레길은 찾는 이들에게 쉼터가 될 것 같아서 좋았고, 모두들 떠나가는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새롭게 가꾸는 모습이 고마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분위기가 변했다. 예전부터 살아온 주민들이 마을이 신당화된다며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저기에 마을 가꾸기에 반대하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반대를 무릅쓰고 벽화와 조형물, 쉼터와 갤러리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필자가 ‘빛의 생명나무’라는 영성단체에서 에너지 힐링센터를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필자는 영성단체와 기존 주민들 중 누가 더 옳은가를 구별할 능력은 없다. 다만 편안하고 신비로운 임곡리가 갈등의 현장으로 변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 속에 서로를 존중하면서 평화를 이루기를 바란다.
(이글은 2023년 11월 16일자 주간 '보은 사람들'에 실린 본인의 글을 사진과 함께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