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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Mar 16. 2024

낭아초를 위하여

"여보, 이거 꽃이 예뻐?" 

 임도를 따라 걷는데 뒤에 오던 아내가 묻는다. 산책 삼아 즐겨 오르는 회남의 묘막산,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가는 길이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돌아보니 손에 어린 묘목 하나를 들고 있다. 약간 붉은 색에 이파리 하나 없이 매끈한데, 땅 속에 있어야 할 뿌리까지 온전히 드러나 마치 벌거숭이 아이의 모습이다. 경칩이라고는 하나 아직 추위가 매서운데 어쩌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 걸까? 잠시 살펴보니 굴삭기가 막 작업을 끝낸 모양새다. 임도의 절개지가 봄이 되어 무너진 것을 굴삭기가 걷어 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린나무가 뿌리 째 뽑혀 길에 나뒹굴게 되었나 보다. 

 "별루야" 


 짧게 대답하고 걷는데 잠시 후에 다시 아내가 묻는다. "여보, 이거 꽃이 예쁜가?" 다시 돌아보니 또 그 녀석이다. 길을 따라 여기저기 같은 묘목이 흩어져 있나 보다. 또 물어보는 아내가 좀 이해되지 않지만,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했다. "아니, 안 예뻐" 그만하면 됐으련만 불과 몇 걸음을 걷고 나니 아내의 질문이 다시 귀에 꽂힌다. "여보, 이 꽃 예쁜가?"


두 번이나 대답했건만 이건 무슨 상황인가, 걸음을 멈추고 아내를 돌아보았다. 발끝에 흩어져 누워있는 녀석들을 내려다보며 발길을 멈추고 서 있다. 이쯤이면 뭔가 확실한 대답이 필요할 듯싶다. 

 "아니, 안 예뻐. 큰낭아초라구, 절개지에 심는 작은 나무야. 이리 이빨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언뜻 보면 싸리나무처럼 생긴 나무에 작고 보라색 꽃이 조롱조롱 매달리는 놈이야." 

 "아하, 알겠다. 꽃 모양이 생각나네" 아내는 그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그런데 왜 세 번씩이나 같은 걸 묻는 거야?" 아내는 좀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내가 세 번이나 물었다고? 아, 그건 자기가 너무 성의 없이 대답하니까 그랬겠지" 순간,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아내가 내 대답을 흘려들은 게 아니라 내가 아내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이다. 아내의 질문은 정말로 꽃이 예쁜가, 아닌가를 알기 위한 의문문이 아니었다. 추운 날씨에 뿌리까지 맨몸을 드러낸 그 어린나무들이 안타깝다는 감탄문이자 웬만하면 가져다가 심자는 청유문이었다는 말이다. 말이란 게 그렇다. 똑같은 말이라도 문맥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을 갖기도 한다.  그러니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할 뿐 아니라 새겨들어야 한다. 그래야 말 한 사람의 진심에 더 정확히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쎄, 뭐 예쁘지 않은 꽃이 어디 있겠어? 이 녀석도 여름에 꽃들이 오롱조롱 달리면 귀엽긴  해. 게다가 좀 억울한 녀석이야. 틀림없이 나무인데, 이름은 풀 ‘초’자가 들어 있어서 풀로 불리거든. 정작 초본인 대나무는 나무로 불리는데, 나무인 이 녀석은 키 좀 작다는 이유로 풀이라 하니 억울하겠지. 몇 개 가져다 심을까?"

그제야 아내는 편안해진 얼굴로 대답한다. "아니야, 화단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애. 절개지에 심는다니까 여기 둑에 남아 있는 게 낫겠어" 역시 공감보다 더 좋은 설득은 없다. 그게 예쁘지 않으니 버리라는 논리보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편이 해피엔딩으로 가는 훨씬 더 빠른 지름길이다. 아내는 발로 주춤주춤 흙을 파고 묘목들을 심어준다. 굴삭기가 막 파헤쳐서 흙이 부드러우니 가능한 것이다. "잘 살아라, 시원한 강바람도 맞고 넓은 대청호도 바라보면서" 아내는 탕탕 발을 굴러 흰 운동화에 묻은 흙을 털고 나서는 배시시 웃는다. 


하긴 확 트인 대청호가 다도해처럼 펼쳐 보이는 게 명당자리임이 틀림없다. 이제 봄인가, 오후 햇살이 제법 따사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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