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70년대 말, 수학참고서는 단연코 ‘수학의 정석’이었다. 흰색 바탕에 노란 띠를 두른 정석 시리즈는 수준과 문과 이과에 따라서 몇 가지 버전이 있었는데,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학생이 이 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다음으로 많이 사랑받은 참고서가 바로 ‘해법수학’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정석’은 수학의 기본 개념을 알기 쉽게 가르치는 편이었고 ‘해법’은 좀 더 어렵고 재미있는 문제를 많이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국어, 영어, 수학으로 이루어진 본고사가 입시의 당락을 결정하던 때였고, 그중에서도 점수의 편차가 큰 수학이 합격의 열쇠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정석’에 ‘해법’까지 들고 다니며 수학 공부에 열을 올린 것이다. 애초에 수학 머리가 없던 나는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격으로 수준에 맞지 않는 해법 수학을 샀는데, 그래도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이 책으로 문제를 풀면서 다음과 같은 나만의 요령들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우선 풀기 전에 문제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급한 마음에 문제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이리저리 집적거리다 보면 풀리기는커녕 복잡해지기 쉽다. 처음 문제를 만나면 차분히, 몇 번을 읽어보고 출제자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문제는 없는 법, 어차피 내가 알고 있는 기본 개념에서 출발한 문제이니 정확히 파악만 하면 해결방안이 스스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문제를 이해한 후에는 지금까지의 문제 풀이 경험 중에서 가장 비슷한 해법을 찾아보고, 그것이 없다면 약간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경험을 응용할 방법을 설계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절대로 문제에 기죽지 말라는 거다. 처음 보는 유형에 당황하여 ‘쫄게’되면 그때부터는 풀이는커녕 이리저리 헤매다가 다음 문제를 풀 시간마저 낭비해 버려 시험을 아예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통째로 풀기 어려우면 부분을 조금씩 해체하는 것도 방법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매듭이라면 우선 눈에 보이는 부분이라도 풀어놓고 다시 관찰하면 다음 매듭이 보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풀이 과정을 놀이처럼 즐겨야 한다. 어렵고 새로운 문제를 만나면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새로운 놀잇감을 만났구나’ 하는 마음으로 달려들어 푸는 게 좋다. 그래야 문제도 잘 풀리고, 풀고 나서 실력과 자신감이 함께 높아진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수학 신동일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수학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수학 때문에 학교 성적은 중위권에서 맴돌았고 일류대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수학과는 관계가 없는(혹은 적은) 전공과목의 입시에서 수학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입시제도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도대체 문학도가 미분, 적분을 배워서 어디에 써먹으라는 말인가, 이건 그냥 어른들의 무지가 만들어 놓은 부조리이며 다음 세대에 대한 횡포가 틀림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알고 보니 수학은 세상살이 곳곳에서 꼭 필요했다.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과정 역시 수학 문제와 닮았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문제가 출제되지만 지금 풀고 있는 문제가 가장 어렵다는 점, 그러나 천천히 풀다 보면 못 풀 문제가 없다는 점 등이 그렇다. 예를 들어보자. 학생 때는 입시라는 문제만 풀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그 뒤로도 취업, 연애, 결혼 같은 처음 보는 문제들이 줄이어 다가온다. 취업과 결혼을 하고 나니 아이도 낳아 길러야 하고, 부부싸움도 해야 하고, 직장에서 사람들과 부딪히고, 부모님이 병에 걸려 돌아가시고, 아이가 속을 썩이고, 가족이 아프고....., 모두 새롭고 어려운 문제의 연속이다.
최근에 ‘카페’라는 새로운 문제를 받았다. 지금까지 만난 문제에 비해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문제다. 새로운 놀잇감을 만난 것이다. 요리조리 살펴보고 조금씩 풀어본다. 기죽을 건 없다. 어차피 문제는 풀리기 마련, 즐기며 풀다 보면 생각보다 쉬운 문제였음을 깨닫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