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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Jul 14. 2024

반전

“아빠 프로그램에 반전 있어?”

20년이 다 된 오래전 어느 날, 중학생인 딸내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던진 말이다. 대화의 맥락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한마디와 분위기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딸이 아빠의 권위를 넘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온몸에 힘을 모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완벽한 논리로 아빠의 허점을 공격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딸이 즐겨보는 드라마나 영화에 대해 그딴 허접한 것에 빠지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식의 잔소리 끝자락에 나왔으리라. 어쨌거나 딸의 의도는 완전히 적중했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송국에서 PD로 일하면서 휴먼다큐를 만들고 있었지만 한 번도 ‘반전’을 염두에 둔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딸과의 설전에서 단칼에 제압당한 나는 돌아앉아 상처를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반전이라니, 그건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써먹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얄팍한 방법 아닌가? 수사물에 흔히 등장하여 마지막에 알고 보니 남편이 범인이었다는 식의 억지스러운 결말로 관객을 가지고 노는 수법이 아닌가? (물론 식스 센스처럼 품격있는 반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구나 영화가 아닌 실제 삶에서 하루아침에 흐름이 바뀌는 식의 드라마틱한 반전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반전’이라는 게 우리 삶에 없는 게 아니었다. 반전은 반드시 복선과 함께한다. 이 말은 반전처럼 보이는 결말이 한편에서는 미리부터 준비되고 진행되었다는 말과 같다. 다만 주인공, 혹은 관객이 아주 작은 변화의 징조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드러나는 결말에 당황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변화’라는 의미에서 ‘예상하지 못한’이라는 주관적인 관형구를 빼고 보면 우리 삶 자체가 반전의 연속이다. 코흘리개가 어느 날 어른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늙어서 죽어가는 과정도 짧게 압축해보면 반전의 연속일 터, 반전은 일상 속에 흔하게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내 삶에도 예상치 못한 반전이 생겼다. 갑자기 카페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2년 전, 마을에 사랑방 겸 카페를 만들었는데 운영자가 갑자기 그만두어서 자리가 비었고, 그 후임자로 아내와 내가 낙점되었다. 딱 하루 만에 이루어진 전격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복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십여 년간 집에서 커피를 볶고 내려 마셨으니 그것도 복선이요, 청년 카페를 만들자고 마을 회의에서 제안한 것도 나였으니 그것도 복선일 수 있겠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시골 마을마다 하나씩 있는 바가 신기했고 우리나라도 마을 카페가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으니 그건 복선의 복선일 것이다. 타고난 음식 솜씨에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며 쌓은 인맥과 경험은 아내가 깔아 놓은 복선이요, 오래된 오디오와 레코드판으로 가요며 올드 팝을 즐겨 들었으니 그것도 작은 복선이려나 싶다.



 카페를 맡으면서 아내와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우선 마을 주민이 이용하는 카페를 만들 생각이다. 아무리 상업적으로 성공을 해도 주민이 찾지 않으면 마을카페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주민에게는 특별가격을 적용할 생각이다. 또 마을 농산물이나 가공품도 팔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마을 사랑방으로, 복합 문화공간으로 만들자는 계획도 지니고 있다. 외부인들에게는 살아있는 전통마을의 라이브 뷰와 오래된 음악으로 다가갈 생각이다.


 카페를 운영하기로 결정된 지 겨우 두 주가 지났는데, 아내와 나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기계를 들여오고, 레시피를 배우고, 인테리어 소품을 만드느라 하루가 짧다. 그 와중에 오래전 딸과의 대화가 떠오른 건 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때 못한 대답을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빠의 프로그램에는 반전이 없었지만, 엄마 아빠의 인생에는 반전이 있단다. 그리고 지금 막 반전의 흐름에 올라탔단다. 응원해 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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