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서 하루를 더 머물며 순례를 마무리한다. 피곤한 몸도 쉬고, 성당도 들러보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마음을 잘 다독거리고 정돈해서 갈무리하는 일이다. 순례기간의 감동과 고통의 순간들을 대충이라도 닦아서 제자리에 놓는 일, 마치 전쟁을 치르고 난 장수가 옷과 무기들을 잘 닦고 정리한 후에야 가족과 식탁에 앉듯이 어떤 일을 끝내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의식이 필요한 법이다.
다음 여행지로는 스페인의 남부 도시, 세비야를 택했다. 원래는 가까운 포르투갈의 포르투를 먼저 가려고 했는데 일기예보에 보니 일주일 내내 비가 잡혀있다. 비가 오지 않는 곳은 오직 세비야와 그라나다, 남부지방뿐이다. 버스비보다도 싼 국내선 저가항공으로 세비야에 도착했다. 일단 해가 쨍 한 날씨가 너무 좋다. 이곳에서 3박 4일을 머물며 스페인 광장과 세비야 성당, 전통시장들을 둘러보았다. 순례자 식단보다는 비싼 밥도 사 먹었다.
세비야 성당에서 내려다본 세비야 시가지
스페인 광장. 높지는 않지만 균형 잡힌 건물과 회랑, 광장이 아름답다.
스페인 광장 입구에서 오래된 친구로 보이는 두 할아버지가 버스킹 중이다.
하몽을 파는 상점과 아랍 식당의 점심식사
그러나 정작 나에게 감동을 준 곳은 세비야에서 좀 떨어진 절벽 위의 도시, 론다(Ronda)였다. 론다는 투우장과 누에보 다리로 잘 알려진, 인구 4만 정도의 크지 않은 관광지다. 누에보 다리는 120m, 아찔한 높이의 협곡에 걸쳐 세워져 있는데 클래식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누에보(nuevo, 영어로는 new)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1793년, 40년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는데 물론 그 당시에는 최신식 다리였으리라. 높은 교각을 절벽에 붙여 쌓아서 마치 다리와 절벽이 하나인 듯, 안정감이 느껴진다. 론다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고 늘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론다에서 감동받은 것은 정작 누에보 다리가 아니라 다리가 걸린 절벽이었다. 그것도 내려다본 절벽이 아니라 올려다본 절벽 말이다. 절벽을 따라 구불구불 오솔길로 잠시 내려오면 다리와 절벽을 중간쯤에서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 이 지점에서 올려다보면 절벽 위의 아슬아슬한 집들과 난간에 기대어 선 사람들과 누에보 다리 상판이 차례로 보이고 아래를 보면 계곡과 나무와 집들, 그리고 그 집들을 잇는 마을 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처음 다리와 절벽을 바라보자니 묘한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마치 절벽에 빨려 들어가듯 어찔한 현기증과도 흡사한 느낌 말이다.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말은 너무나 무책임한 표현이다. 절벽을 마주한 이 먹먹한 느낌을 도대체 무슨 말로 표현할 것인가? 때마침 오후 햇살에 절벽이 제대로 조명을 받은 탓일까, 아니면 깎아지른 절벽 옆으로 확 트인 평원과 멀리 보이는 산들이 묘한 원근 대비를 이루어서일까, 따스한 햇살과 절벽이 주는 묘한 마력에 한참을 바라보던 내가 겨우 생각해낸 표현은 숨이 멎을 듯, 시간이 멈춘 듯이라는 말이었다.
절벽이 처음 생겨나던 수 십만 년, 혹은 다리가 세워지던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금 한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느낌, 어쩌면 시간은 한 번도 흐른 적이 없는데 햇살과 바람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절벽을 바라보고 오갔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강렬하게 나를 붙잡는다. 그 느낌을 가슴에 품고 그대로 절벽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적당한 소음조차 절벽에 흡수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정지한 것 같은 야릇한 느낌.
그 이상한 느낌은 묘하게도 나에게 위로와 안식감을 준다. 사실은 나 역시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어렸을 적 형아 누나와 자라 난 과수원 집, 해마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던 삽작 거리와 향긋한 사과향기, 그리고 어리광 피우고 재잘거리기 좋아하는 키 작고 까무잡잡한 어린아이는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혼부부로, 신입사원으로 철없이 부대끼던 나의 젊은 시절도, 그리고 알 수 없는 마력에 홀린 듯 절벽을 바라보는 이 순간도 어쩌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될지도 모른다. 아니,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한 공간에 영원히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다.
오후 햇살이 석양이 되고, 멀리 찬란한 저녁노을이 어둠이 될 때까지 서너 시간을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래, 론다에서 논다. 아내와 나는 3박 4일을 론다에서 뒹굴거렸다. 넓지 않은 도시에 비슷비슷한 골목길이 지루할 만도 한데 지루할 틈이 없다. 가파른 계단과 좁은 골목을 빠져 나오면 뜻밖의 비밀스러운 장소들이 나타나고, 절벽 아래로 구불구불 마을길을 따라 언덕을 넘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누에보 다리와 절벽의 야경을 눈에 담기도 했고, 유명 관광지라는 조건에 비해 그리 비싸지 않은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들을 둘러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가을 햇살 속으로 빛나는 하얀 집들과 시리도록 파란 가을하늘의 명쾌한 대비, 절벽이 주는 묘한 위로의 느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