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기억들

태어나서 일곱 살까지

by 심웅섭


초점이 맞지 않는 낡은 흑백사진, 내가 기억하는 맨 처음 장면은 칼라도 동영상도 아닌 오래된 흑백사진이다. 사진 속 우리 집은 언덕 위, 작은 판잣집이었다. 툇마루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도 가물가물 보인다. 좁은 비탈길을 얼마간 내려오면 두레박 샘이 있었고 샘 가에서 누군가가 나를 포대기에 업고 있다. 업고 있는 사람이 엄마인지 누나 인지도 모르겠고 물동이를 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 사진이 정말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었던 것인지 나중에 내가 만들어낸 가짜 기억인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세 살이 채 되기 전의 기억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1960년 3월, 충주시 지곡동의 가난한 동네에서 두 형과 누나에 이은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51세, 어머니는 38세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의 늦둥이였다. 위로는 세 살 터울의 작은형, 여섯 살 터울의 누나, 열세 살 차이의 큰 형이 있었고 여덟 살 많은 사촌누나와 아버지보다 스무 살이 많은 할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었다.


세 살 무렵에 우리 집은 지곡동에서 곡말 고개의 과수원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나 그리 오래 살지 않아서 이곳에서의 기억 역시 다채롭지 않다. 농막 수준의 작은 농가에서 누나 둘과 작은형이랑 낄낄거리던 기억, 나에게 보자기를 씌워 여장을 시켜놓고는 재미있어하던 누나의 모습, 튀밥 자루를 메고 지나간 동네 형을 보고는 누나가 어린 나를 튀밥 특사로 보내려고 교육을 시키던 모습이 떠오른다. 누나는 손을 앞으로 모으고 '튀밥 주세요' 이렇게 해보라고 반복 교육을 시켰고 나는 그런 역할에 무척 자존심이 상했었다. 엄마가 충주의 재래시장(아마 무학시장 어디쯤일까)에서 새우젓 가게를 한 것 같기도 하고 부근에는 흙으로 벽을 바른 떡집과 머리에 쪽을 찐 떡집 할머니가 역시 상상처럼 기억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흑백에서 칼라로, 사진에서 동영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여수월 과수원으로 이사를 오고 난 이후다. 이곳에서 어림잡아 너댓 살 정도부터 열세 살 까지 살았으니 내 어린 시절 기억의 대부분은 이곳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다. 집은 방 두 개와 부엌, 그리고 가운데 광이 있는 초가집이었다. 사랑방은 할아버지와 큰 형이 함께 썼고 안방은 엄마 아버지 사촌누나 누나 작은형에 나까지 모두 여섯 명이 함께 썼다.

(나중에 가운데 광에 방을 들여서 누나와 사촌누나가 함께 썼다). 작은 안방에 여섯 명이 누우면 그야말로 아랫목에서 윗목까지 꽉 찼고 아귀가 맞지 않는 방문은 여닫을 때마다 삐그덕거렸다. 안방과 부엌 사이에는 작은 쪽창이 있었고 창틀에는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잡동사니들이 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안방 문을 나서면 크지 않은 마루가, 마루를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부엌이 있었다. 부엌에는 나무를 때는 아궁이와 연탄아궁이가 함께 있었고 한쪽으로는 나뭇가지가 항상 땔감으로 쌓여 있었다. 작은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하느라 부엌 천정의 서까래는 그을리다 못해 까맣게 반들거렸다. 오래된 초가지붕에서는 가끔씩 굼벵이가 떨어졌고 겨울에는 누런 고드름이 매 달렸다.

안방 앞으로는 장독대가, 장독대 옆으로는 사립문 거리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해마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고 졌다. 해마다 심지 않아도 저절로 씨가 떨어져서 코스모스 꽃길을 이룬 것이다. 과수원은 주로 사과나무가 많았고 집 뒤로는 오얏나무와 복숭아나무, 포도나무도 몇 그루 있었다. 사과는 국광이 주종이었지만 그밖에도 인도 홍옥 데리샤쓰 베니새끼 등의 국적 모를 이름들이 함께 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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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새끼에 얽힌 기억 하나. 해마다 7월쯤이면 작은 형과 나는 묘한 경쟁을 하곤 했다. 바로 베니새끼라는 사과를 줍기 위해서 먼저 일어나기 경쟁을 벌인 것이다. 이 나무는 과수원에 딱 두 그루가 있었는데 다른 사과는 채 크기도 전에 푸석하고 달달한 맛으로 익으면서 꼭지가 물러 떨어지곤 했다. 아직 다른 품종의 사과가 익기 전이니 요 달달한 사과를 무척 탐했는데 문제는 두 형제가 모두 그렇다는 점이다. 새벽이면 졸린 눈을 비비고 비척거리며 사과나무로 달려갔고 먼저 작은형이 와 있거나 다녀간 흔적이 보이면 무척이나 속상해했다.

강아지를 두고도 형제는 늘 티격태격이었다. 과수원을 지키려다 보니 집에는 늘 개 한 두 마리쯤 키우곤 했는데 새끼라도 낳으면 형제가 한 마리씩 끌어안고 장난감을 삼았다. 아직 젖을 먹는 강아지 입에서는 고소한 어미젖 냄새가 났고 이 냄새가 좋아서 코와 입을 들이대고는 물고 빨았다. 그러다가 상대편 강아지를 밀쳐내며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는데 물론 어린 내가 주로 앵앵거리며 울음보를 터뜨리곤 했다. 엄마 아빠는 우리에게 벼룩 옮는다고 주의를 주긴 했지만 강력하게 금지하지는 않으셨다.


나는 작고 새까맣고 조잘조잘 말이 많았다. 나름대로의 박자와 멜로디로 혼잣말을 만들기도 했다. 부지런히 걸으면서는 '부지가야, 부지가야', 오래된 펌프로 물을 푸는 소리는 '아누나 똑딱'으로 따라 표현했다. 하도 쫑알대니까 가끔씩 찾아오는 당숙모는 나를 스피까라고 했고 동네 누나들은 신기해서 일부러 말을 붙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타고난 약골에 환갑이 다 되셨고 할아버지는 이미 80이 가까우셨다. 돈이 되기에 과수원 나무는 너무 어렸다. 엄마가 행상에 나섰다. 시온 간장, 스텐그릇, 이불.....,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머리에 이고 행상을 다녔고 덕분에 우리 가족은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 무렵 이웃들이 워낙 가난해서 우리가 가난하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과수원을 하고 있었고 나쇼날 라디오도 있었으며 아버지의 오메가 회중시계가 있어서 오정 사이렌이 아니어도 시간을 알 수 있었다. 밥을 굶지도 않았고 도시락을 못 싸간 적도 없으며 매달 300원씩의 육성회비를 밀린 적도 없다.

그러나 내가 어린 시절을 핑크빛으로 기억하는 것은 순전히 가족의 사랑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는 엄하기는 했지만 우리를 사랑하셨고 형과 누나들은 언제나 나를 보살폈다. 과수원에는 먹을거리와 놀거리가 지천이었다. 귀여운 강아지는 철마다 태어났으며 사과와 복숭아꽃, 코스모스는 해마다 흐드러지게 피었다. 병아리는 어미 닭을 종종거리며 따라다녔고 새끼 돼지들도 꿀꿀거리며 과수원을 누볐다.(새끼 돼지들이 얼마나 귀엽고 재빠른지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에 누으면 밤하늘에 별들은 쏟아질 듯 반짝였고 엄마는 밤새도록 부채질로 모기를 쫓아주었다.


엄마 아빠 사이에서 눈을 뜬 이른 아침, 채 밝아지지 않은 방의 천정 구석으로는 예쁜 색의 알갱이들이 떠 다녔다. 그것들은 벽지에 그려진 자잘한 꽃무늬처럼 동글동글 규칙적인 패턴이었으며 내가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 마치 개구리 알처럼 천천히 밀려다녔다. 그 알갱이들을 눈으로 좇으며 엄마 아빠에게 얘기를하면 두 분은 알듯 모를 듯 미소만 짓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순수한 어린아이에게만 보이는 행복의 알갱이 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형과 누나가 모두 학교에 가고 혼자 남았을 때다. 엄마는 장사하러 가시고 아버지는 과수원 일을 하시면 기나긴 낮 시간을 혼자 놀아야 했다. 마음에 드는 회초리를 골라서 상상의 적과 칼싸움도 했고 맨손으로 메뚜기며 땅강아지를 잡아서 놀기도 했다. 개미집을 후벼 파기도 했고 귀찮아하는 개를 따라다니며 코를 주물럭 거리기도 했다. 뻐꾸기는 지겹게 울어댔고 시간은 아주아주 더디게 흘렀다. 그렇게 나는 일곱 살을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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