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엔떼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 – 에스떼야 (Estella), 10월 23일
여느 날처럼 아침 8시에 출발, 비가 오락가락이라서 판초 우의를 꺼냈다 넣었다 반복한다. 아무리 우기가 다가온다고는 해도 스페인은 날씨가 너무 변화무쌍이다. 갑자기 후두두둑 비가 내리다가 또 잠시 걷다 보면 햇살이 나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된다.
스페인을 걷다 보면 오래된 집이 참 많다. 몇 백 년 된 집들은 오래된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다. 우리나라 같으면 하다못해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고도 남을 집들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 내부가 궁금하긴 하지만 남의 집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당은 집들보다 더 크고 화려하고 오래된 것들이 많다. 대부분 사용을 하지 않는, 빈 건물이거나 어떤 경우는 건물은 무너지고 종탑만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화려한 과거, 도시화로 인한 농촌 공동화, 가톨릭과 스페인의 쇠퇴, 거기에 전쟁과 자연재해가 많지 않은 자연환경......, 이런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서 가능한 일이 리라. 21세기에 중세마을을, 일부러 꾸미거나 보전해 놓은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진짜 마을을 걸을 수 있다니, 꿈만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페인의 마을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 않고 성당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가톨릭이 일상생활에 끼치는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그럴 수도 있고 영주에 소속된 농노들이라서 그럴 수도 있으리라. 순례길은 보통 마을의 중심인 성당을 지나간다. 오래된 길과 오래된 집과 오래된 가게와 음식점, 알베르게가 모두 순례자 앞에 파노라마처럼 차례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단순히 발만 움직이는 단조로운 행위만으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여행이라도 온 듯싶다.
다시 비가 그쳤다. 멀리 언덕에 오래된 마을 하나가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그 마을 위로 쌍무지개가 또렷하다. 놀라운 광경이다. 어쩌면 저렇게 선명할까? 마치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다. 무지개의 뿌리, 무지개와 땅이 맞닿은 곳을 눈으로 찾아본다. 마을 뒷산 소나무 숲 사이 어디쯤이다. 저곳에 오르면 무지개가 잡힐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장면에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래, 어렸을 때 보던 장면이다.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과수원집 막내둥이, 형 누나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혼자 지루한 여름날을 보내고 있었으리라. 소나기가 그치자 갑자기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계명산을 뒤로하고 쌍무지개가 떴다. 순식간에 마술처럼 커다란 빛의 터널이 하늘에 나타난 것이다. 그때도 무지개의 뿌리를 눈으로 좇으면서 저곳에 가면 무지개를 만질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었다.
어쩌면 50년도 더 된 장면인데, 그 느낌이 이리도 생생하다니. 그런데 이상하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무지개를 본 기억이 없다. 무지개는 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걸까? 공기가 오염돼서 그럴까, 도시에서는 원래 안 보이는 걸까, 아니면 다른 볼거리에 정신을 팔려서 내가 발견하지 못하는 걸까?
무지개를 향해 걷는다. 햇살이 퍼지면 사라져 버릴 무지개는 어쩌면 빛과 물방울이 만들어 낸 환영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은퇴자의 삶을 시작하는 이 순간, 나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약속, 혹은 게시라고 믿고 싶다. 이제부터는 관찰자가 아니라 주인공으로,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네 맘대로 살아보라는 그런 게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