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5일 차, 많이 가라앉았다. 외국여행이 주는 설렘, 중세 마을들을 지나며 느끼는 신비함, 걷는 행위가 주는 고통과 쾌감까지도 서서히 익숙해진다. 아무런 느낌이나 생각 없이 그냥 터벅터벅 걷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명상도 그렇다. 처음에 몸을 풀고 앉아서 호흡을 고른다. 코로 들어온 호흡을 단전까지 깊게 밀어 넣고, 아랫배를 약간 집어넣으며 천천히 내 쉰다. 이 동작을 열 번쯤 하고 나면 호흡이 느려지고 온 몸이 이완된다. 이제부터는 숨이 들고 나는 과정만 관찰한다. 코에서 단전으로 단전에서 코로, 다시 코에서 단전으로 단전에서 코로......,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내 호흡만 바라본다. 참 쉽다. 그런데 어렵다. 호흡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아차 하는 순간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다. 명상이 아니라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명상은 결국 쓸데없는 생각을 끊는 것인데, 이게 쉽지 않다. 뭔 생각이 그리 많은지, 앉아서 호흡을 하다 보면 별의별 잡념들이, 하다못해 수십 년 전의 잊었던 기억들까지도 꾸역꾸역 올라온다.
생각을 끊는 방법 중의 하나가 단순한 동작의 반복이다. 호흡을 바라보는 것도, 진언을 외우거나 절을 하는 것도, 걷는 것도 단순한 동작이다. 터벅터벅 걷는 단순 동작을 5일쯤 하고 보니 호흡으로 치면 제법 길어지고 몸이 이완되는 단계쯤 왔나 싶다. 처음 느꼈던 설렘과 신기함, 몸의 고통과 뒤죽박죽 떠오르던 망상들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내가 느낀 것 중 하나가 기운이 맑고 강하다는 것이다. 말한 것처럼 나는 기공 수련과 명상을 아주 조금 맛보았는데 높은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몸은 좀 예민해졌다. 기운을 잘 느낀다는 거다. 어떤 산이나 장소에 가면 그곳의 느낌 혹은 기운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맑고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특히 피레네를 넘을 때가 최고로 강했고 피레네를 넘어서 로그로뇨 까지가 강했다. 마치 순례길을 따라 어떤 기운 대가 뻗어있는 느낌이랄까? 그게 예수님인지 야고보나 다른 성인들인지, 하다못해 이 길을 구원과 속죄의 염으로 걸었을 수많은 순례자들의 의식이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맑은 기운을 몸으로 느끼며 그 속에서 걸으려 했다. 걷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딴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내 중심을 기운에 맞추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까미노를 지켜주는 존재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런 아름답고 맑은 길을 순례자로 걷게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여행이 낯선 곳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는 즐거움에 더해서, 자신을 괄호 밖에서 바라보는 좋은 기회라고 여긴다. 익숙한 환경, 일상에서 벗어나서 전혀 낯선 곳에 자신을 풀어놓으면,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생각들이 올라오기도 하고 풀리지 않던 인생의 문제들이 스스로 답을 내놓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다시 말해서 괄호 밖에서 바라보기를 한 결과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쩌면 나를 통째로 괄호 밖으로 꺼내놓자는 의미였다. 30여 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기나긴 은퇴자의 삶을 시작하는 전환기, 살아왔던 삶의 연장이 아니라 뭔가 근본적인 방향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좀 오래 걷는다고 그 답이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길을 걸으며 막연하게나마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것이다. 40일간 단조로운 길을 단조롭게 걷는 순례라는 여행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5일쯤 걷다 보니 엉뚱한, 사실은 내게 가장 절박했던 문제가 먼저 올라왔다. 바로 아들 문제.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들어와서 국가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두 번의 시험에서 모두 낙방했다.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부모 밑에 들어와서 취직도 아니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다가 두 번씩 낙방했으니 본인은 얼마나 힘이 들까 싶지만, 아빠인 나는 나대로 속상하고 힘들었다.
점심시간 무렵, 아스팔트 차도 옆으로 난 까미노를 걷던 중이었다. 옆으로는 가끔 차도 다니고 앞뒤로 순례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에서 느닷없이 아들 생각이,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에 대한 답이 쑥 올라왔다.
너는 너대로, 아들은 아들 대로,
모두 각자의 과정에 맞는 길을 걷고 있다.
내가 지어낸 생각인지, 누군가가 마음속에 속삭여 준 생각인지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 생각이 나를 강하게 감싸며 순간 눈물이 왈칵 솟는다. 그래, 그렇구나. 우리 모두 각자의 길을 순례자처럼 걷고 있구나. 내가 다른 순례자들의 걸음걸이를 걱정하지 않고 다른 순례자가 내 걸음걸이에 간섭하지 않듯이, 그저 서로 바라보고 응원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만 도와주듯이, 아들과 나는 그렇게 같은 길을 따로 걷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내 길만 걸으면 되는 일이다.
갑자기 아들 문제가 별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것이 야고보든 다른 영적 존재든 나 자신의 잠재의식이든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눈물이었다. 환갑이 다 된 녀석이 순례자들 속에서 갑자기 눈물이라도 흘린다면 얼마나 꼴불견일까? 가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눈물을 두 번 눌러 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