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 수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올해 여든아홉, 장모님이 노래를 부르신다. 결혼한 지 30년이 넘도록 나는 지금까지 장모님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딸인 아내도 아주 어렸을 적에 본 것을 희미하게 기억한단다. 그렇다면 대충 50년 만에 부르신다는 말인데, 그러나 장모님의 '동백 아가씨'는 음정과 박자는 물론 가사 하나 흔들림이 없다. 요즘 부쩍 기력이 약해지시고 어지러워하시는 장모님을 위해 위문공연을 한다고 너스레를 떨며 기타를 꺼낼 때까지만 해도 장모님은 다 잊어버렸다고 완강하게 버티셨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서툰 전주를 하고 서너 마디 시작하자 못 이기는 척 부르시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가 지쳐서
꽃잎이 빨갛게 멍이 들었소
꽃무늬 셔츠를 입고 비스듬히 앉아 노래하시는 장모님을 바라보는데 문득 서른아홉 젊은 여인의 모습이 슬그머니 겹쳐 보인다. 어느새 자신감이 붙은 듯, 노랫소리에 힘이 실린다. 사실 장모님은 동네 가수였단다. 관광버스에서는 혼자서 마이크를 잡고 한 시간씩 유행가를 부르셨단다. 요즘은 흔한 노래방 기계조차 없던 시절이니 그 많은 노래의 가사를 모두 외워서 했다는 말이다. 얼마나 노래가 재미있고 흥이 많아 그리 불러대셨을까? 아니, 그렇게 넘쳐나는 흥을 어떻게 눌러 참고 사셨을까? 어쩌면 공무원 박봉으로 홀시아버지와 4녀 1남의 자식들을 키워내느라 켜켜이 쌓인, 요즘 말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그리 노래를 하셨을까?
사실 나는 이미자의 노래나 트롯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싫어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최고의 인기가수가 바로 이미자였고 라디오에서나 술자리에서나 흔하게 불러댔으니 웬만한 이미자 노래들은 귀에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동백 아가씨'는 1964년 제작된 영화 '동백 아가씨'의 주제가로 세상에 나왔단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배우인 신성일과 엄앵란이 대학생과 섬처녀로 열연을 했고 순정을 바치고 버림받은 섬처녀의 애련을 그야말로 신파조로 그린 영화가 바로 '동백 아가씨'란다. 그러나 1960년 생인 내게는 어른들의 노래였고 나와는 상관없었다. 거기에 트롯이라는 장르의 질질 늘이고 꺾어대는 창법도 귀에 거슬렸다. 일본 엔카가 한국에 들어와서 트롯이 되었다는데 뭐, 문화라는 것이 국경을 넘어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생물이니 그러려니 해도 하필이면 식민지배를 한 일본문화라니. 더욱이 왜색이라는 이유로 방송 금지되고 나중에는 음반 제작마저 금지되었으니 내가 들을 일도 관심 가질 일도 없는 잊혀진 노래가 될 수밖에. 대신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조동진으로부터 송창식 윤형주로 대변되는 7080 노래들과 대학가요제 출신 노래들, 그리고 나중에는 김광석 신해철까지의 소위 90년대 인기곡들까지였다. 가끔 가요무대에서 듣는 '굳세어라 금순아' 등의 4-50년대 대중가요들, 어릴 적 나이 차이 나는 큰형이 즐겨 부르던 '고향무정', '산 넘어 남촌에는' 등도 귀에 익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귀에 익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백 아가씨'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순간은 10여 년 전, 오디오 바꿈질을 위해 대구의 어느 공장을 찾았을 때가 아닌가 싶다. 스피커를 판다는 분은 대구시내 외곽에서 무슨 기계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님이었고 나는 오디오계에 막 발을 디딘 초년생이었다. 사장님은 커다란 기계들 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스피커(지금 생각해보면 알텍이었으리라)와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는 바로 문제의 '동백 아가씨'를 틀어주었다. 반주 소리와 젊은 이미자의 꽉 찬 목소리가 한 올 한 올 살아나더니 쩌렁쩌렁 공간을 채우고, 뒤이어 내 심장은 물론이고 솜털 한올까지 흔들어 대는 것이 그야말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마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만 보다가 폭포수를 머리에 뒤집어쓴 충격이랄까? '동백 아가씨'는 그 순간 바로 살아나 내 가슴에 깊이 안기게 되었다. 뒤이어 슬금슬금 다른 트롯들도 내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동명의 영화에 삽입된 '봄날은 간다', 영화 '국제시장'에 삽입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언젠가 야유회에서 젊은 여작가가 부른 '칠갑산' 등이 뒤를 이었다. '소양강 처녀'도 '울고 넘는 박달재'도 '고향무정'도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내 곁에 자리를 잡아갔다.
물론 드물게 요즘 노래들 중에서도 내게 다가온 녀석들이 있다. 대표적인 가수가 장기하다. 무심한 듯, 감정 없는 듯 툭툭 내뱉는 창법으로 부르는 '싸구려 커피'나 '아무것도 없잖어' 등의 노래를 들으며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희망 없는 참담한 현실들을 어찌 그리 평범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어적으로 툭툭 내뱉을 수 있을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정도로 굳어진 그들의 아픔과 체념이 오히려 가슴을 아프게 하고 한편으로는 엄청난 저항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 짧고 단순한 노래에 한 시대, 한 세대의 애환과 저항을 압축해 넣었구나, 엄청난 통계수치와 화려한 논리로 쓴 어떤 글이나 웅변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말이다.
다른 세대의 노래를 통해서 나는 아마도 그 세대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이해하는, 아니 몸으로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기하를 통해서는 미래 없는 젊은이들의 체념과 저항을, '굳세어라 금순아'를 통해서는 한국전쟁 직후 생이별을 해야 했던 민중들의 고통을, '동백 아가씨'를 통해서는 그 당시 가난과 가부장적 권위에 눌려 살아온 여인들,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멍든 가슴을 느낀다는 말이다. 오늘 장모님의 '동백 아가씨'가 내 가슴을 울리는 것은 하루에 네 시간밖에 못 주무시면서 종종걸음을 쳐야 했던 장모님의 힘들고도 아름다웠던 시절, 그리고 이제 아흔을 앞두고 그 시절을 돌아보며 느끼는 가슴 저린 그리움이 전달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 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
그렇게 장모님의 '동백 아가씨'는 50년의 시간을 가볍게 뛰어넘어 붉은 꽃잎을 터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