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곳을 잃어버린 당신에
“사람들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진리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문득, 버스 안에서 오랫동안 첫 페이지에 멈춰있던 《시지프 신화》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다시 마주한 글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바로 위의 문장이었다. 우리는 타의적으로 삶을 시작하고, 본능적으로 삶을 지속하며, 자의적으로 삶을 재생산해 낸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삶이 살 만한가’라는 가치 판단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말로 귀결된다.
살 만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는 인간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가치는 주체인 인간의 내면에서 정의되어 ‘인생이 살 만하다’는 판단의 기준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삶의 여정은 항상 그 가치의 정의와 함께하기 마련이다. 나는 나의 가치를, 나의 가장 외면적인 모습에서부터 탐구해 보고자 한다.
내가 최근 가장 즐기는 일은 시끄러운 클럽 스피커 옆에서 ‘나’라는 존재의 특정성을 숨긴 채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며, 전혀 모르는 타인과 순간적인 대화와 춤으로 소통한다.
사실 그 순간 소리치는 내용의 대부분은 욕설이다. 나도 슬프다고, 나도 너무 힘들다고 쏟아내는 비명에 가깝다. 거대한 볼륨의 리듬 속에서 느껴지는 도파민을 빌려 나는 간신히 회복한다.
집에서 막내인 나는 늘 가족들에게 어리지만 믿음직한 아들이자 동생이었다. 그랬기에 우리 가족을 너무 일찍 덮친 이별의 순간에도 나는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울 공간은 없었다. 나의 울음이 가족들에게는 '걱정'으로 치환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내린 '살 만한 인생'의 정의는, 가족이라는 확장된 자아 속에서 내 역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이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나는 피난처로서 술과 리듬을 찾는다. 잠시 보편적 행동기준에서 빠져나가는 공간을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마지막을 이렇게 상상하곤 한다. 태가왕의 학교를 짓고, 그곳이 안정적으로 정착되어 지역 사회가 발전하는 시작을 목격하는 것.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마지막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때, 꿈을 향해 달리다 떠나는 것이다.
누군가는 꿈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혹은 타인의 기대가 지나쳐서 ‘나’로 인해 꿈의 가치가 훼손될 때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하지만 꿈의 주체를 오롯이 ‘나’로 한정하고, 인간의 삶이 결코 직선이 아님을 직시한다면 그 가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게 여유를 줄 때에야 비로소 인생이 가진 달콤한 가치들이 실체적으로 가늠된다. 혹시 지금 삶의 무게에 대해 진실되게 고민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부디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보길 기원한다.
‘가치 판단을 잠시 유보하는 것’을 하나의 선택지로 삼아보자. 지금 당장 결론 내지 않아도, 삶은 계속될 권리가 있다. 또한 우리는 언제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09’로 전화하자. 아니면 가까운 병원을 가보자. 사랑합니다. 나의 독자들.
때론 살만하다는 가치가 나에게 위치하지 않을 수 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의 부분으로 마무리한다.
이글로 나의 온기가 여러분의 가치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파블로 네루다의
‘나의 황혼의 하늘에서(En mi Cielo al Crepúsculo)’ 중
내 황혼의 하늘에서 너는 한 점 구름 같고,
너의 색과 형상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다.
너는 나의 것, 나의 것인 달콤한 입술의 여인이여,
너의 삶 속에 나의 끝없는 꿈들이 살아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