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성의 박제

by 봉킹

야생성의 박제

오랜만에 만난 산악부 친구들과 늦은 새벽을 보내며, 목표와 활동성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보고자 했다. 누군가는 지리산 종주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우리가 가진 기술이 사실은 인공 암벽에서만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진술하고야 말았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날개』 속 도입부이다. 어쩌면 이는 우리로 정의되는 존재들을 가장 합리적으로 추상하는 문장이다. 산악부라는 명칭은 유지되고 있지만, 동아리 활동은 학교 내 인공 암장과 우천 시의 실내 암장으로, 결국 인공 시설에서 이루어지는 ‘스포츠 클라이밍’으로 귀결된다. 산악부에서 ‘산악’은 3월과 4월의 몇몇 행사를 제외하고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과거에는 인공 암벽에서의 기술 훈련을 기반으로, 산악에서의 도전을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략 10여 년 전, 산악부 창립 N주년 기념으로 고산 원정을 떠난 것이 마지막이었고, 동아리방에는 더 이상 새로운 등정 사진이 걸리지 않고 있다. 누군가는 고산 원정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한다. 정확히는, 고산 등정이 지니던 목표의식과 도전성이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져 갔다는 사실일 것이다. 과거 우리 사회는 고도의 성장기를 겪었고, 그 시절에는 빠르게 변화하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커다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미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그 시절 먼저 간 이들이 올려놓은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기에, 새로운 거대한 목표보다는 소소한 일상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고산 원정이 주요 활동에서 사라지며, 활동 또한 기술 연마보다는 일상 속의 등반으로 변모해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야생성을 박제한 채, 그 행위의 형태만을 품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더 이상 바위에서 풍기는 이끼와 풋풋한 먼지 냄새는 없다. 대신 미묘한 땀 냄새와 저녁으로 먹은 음식 냄새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과연 이렇게 야생성을 박제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담론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거창한 결론은 아니지만, 내 생각을 밝혀본다면 야생성이 지니는 희생과 용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중요한 자산이다. 자연에서의 멀티 피치 등반은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탑로프 등반과 달리, 선등자와 후등자가 서로의 안전을 책임지는 구조를 가진다. 이 과정은 입장의 교류를 유도하고, 서로의 안전을 온전히 지켜내는 순간 속에서 용기와 희생을 체험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소한 경험들이 결국 한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일상에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한 책임감을 길러낸다.


아무도 가지 않았거나, 혹은 누군가는 갔지만 힘든 길이라 주저하는 그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그것이 야생성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야생성을 필요로 한다. 언제나 순응하는 삶을 살더라도, 언젠가는 한 칼을 뽑아 높이 쳐들고 나아가야 할 순간이 필연적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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