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1
매일같이 바다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반복되는 일상들은 때론 ‘일상’이란 단어로 무색무취로 기억되곤 한다. 그날도 그런 하루 중에 하나였다. 서핑 강사로서 보내는 두 번째 해였다. 첫해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였기에 매 순간이 새로운 경험이었고, 메인 강사님의 지도 아래 항상 고객의 즐거운 추억을 위해 체험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방법에 대해 배우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야 하는 격리된 섬의 관광지였기에 모든 사람들이 밝았고 항상 웃음이 가까웠다. 그렇기에 매 순간순간이 다른 맛, 다른 향기로 푸른 바다에 남았다. 하지만 두 번째 해의 서핑 강사 생활은 첫 해의 강렬한 기억을 덮지는 못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태풍이 한반도 옆을 지나는 날이었다. 맥반석 계란을 만들려는 듯 모래를 뜨겁게 데우던 햇살은 구름을 피해 숨어버려, 덥다는 느낌보다는 축축하다는 느낌이 스미는 날이었다. 파도는 성인 남성의 가슴 정도로 치며 서핑을 배우기에 딱 좋은 파도였다. 해가 중간에서 넘어가는 시간에 아빠와 딸이 손님으로 왔다. 멀리 대전에서 왔다며 ‘딸이 서핑을 배우고 싶어 해요!’라는 인사를 건네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정도라 평소의 잔잔한 바다에서 혼자 서핑 보드를 가지고 다닐 정도의 체구였다. 그날은 그 친구에게 자기 몸만 한 파도가 덮치고 있었기에 조금은 무서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냥 수업을 진행했다. ‘서핑 보드 명칭은, 동그란 앞부분이 노즈…’라며 기초 이론 수업을 하고, 비바람을 천막에서 피하며, 보드 위에서 일어나는 법을 위주로 자세 연습을 하며 아이에게 물에 빠지더라도 겁먹지 말고! 발에 달린 리쉬를 당겨서 보드를 잡고 뜨면 구하러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바다로 입수해 내가 담당하는 다른 손님들과 함께 거친 파도 속에서 큰소리로 교육을 진행하며 어른들이 하나둘 연습한 자세로 보드 위에 서 갈 때쯤 그 아이는 물에 빠졌고, 나는 조금 늦게 그 친구를 도와줄 수 있었다. 배우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찾아온 아이가 공포를 만나, 해변으로 나가고 말았다.
아직은 작은 아이에게 나는 너무 무리하게 수업을 진행했다는 아쉬움이 남았고, 아버지를 더 열심히 밀어드리며 수업을 마쳤다. 해변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어머니의 인사에 내심 숨겨 왔던 미안함과 아쉬움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태풍 파도 속에서 뻗어버리신 아버님께 “혹시 해변에서 친구를 받아만 주시면 제가 손잡고 들어가서 추가로 수업을 진행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라고 물었다. “아버님은 힘드신 거 아니에요?”라며 되려 물으신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곤 아이 옆에 앉아 얘기를 나눠 본다. 역시 아이는 순간적으로 마신 바닷물에 놀라 무섭다고 하며 겁을 냈다. “그럼 선생님 손잡고 들어가서 해보는 건 어때요? 요기 앞은 얕은데?”라며 살살 꼬셔 본다. 공주님이 다시 밝은 표정으로 “넹!”이란다.
아버님에게 물 한 잔 건네고 체력을 채워 아이 손을 잡고 들어가서 해변으로 작은 파도를 골라 밀어 보낸다. 처음 몇 번은 겁먹은 탓인지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럼 친구, 일어나지 말고 파도만 느껴봐요.”라며 속도감에 맡겨 본다. 그렇게 몇 번 손잡고 들어가길 반복하니 아이가 먼저 “선생님, 저 이번에는 일어나 볼래요.”라고 말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일어나는 자세를 연습하고 조금 살짝 큰 파도에서 밀며 “하나, 둘, 업!”을 외친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일어서 파도를 타고 아버님의 품으로 안긴다. 돌아보는 아이의 얼굴에 파도가 겹쳐지며 나도 선글라스로 가린 눈에 웃음이 진다. 그런데 뒷머리가 차갑다. 세트파도가 오는 걸 까먹고 있었나 보다. 하! 세트파도는 그 시간대의 파도 중 가장 크고 힘이 좋은 파도를 말한다. 오늘 파도가 가슴이었다면 세트는 머리 정도였을 거라 생각한다. 파도 따라서 날아가 모래 속을 한참 헤매다 올라오며 선글라스를 찾는다. ‘휴, 죽을 뻔했네.’라는 생각이 앞선 감동을 덮는다.
행복했지만 아쉬운 마무리로 무색무취의 일상으로 넘겨진 페이지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리뷰였다. 내가 그 아이 손을 꼭 잡고 바다 앞에 선 그 모습을 찍어서 올리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무색무취의 일상으로 보낸 하루가 누군가에겐 쨍하고, 달콤한 하루였다니, ‘이래서 바닷일 하나 보다!’라고 곱씹으며 그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쉽지만 어렵고 선물 같은 나날을 보낸 기억이 있다는 게,
그런 기억을 만들어 주는 일을 했다는 게
나에게 가장 큰 축복이며, 감사한 일이다.
무색무취의 일상을 가장 열정적으로, 무색무취적으로 살아가다 보면 때론 그 일상이 쨍하고, 달콤한 이야기로 남기에 매 순간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