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첩 속에 든 나날

기록되는 삶

by 라면

엄마가 사 준 가방을 아직 메고 다닌다. 끈이 하나로 되어 있어 한쪽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는 까만 크로스백이다. 다른 가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수납공간이 적지 않으면서도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 주로 이 가방을 메고 다닌다. 가방 뒤쪽엔 지퍼로 여닫을 수 있는 별도의 수납공간이 있다. 앞쪽 수납공간은 버클로 여닫아야 하기 때문에 빠르게 물건을 수납하기엔 부적합하다. 그래서 지갑이나 핸드폰 같은 것들은 뒤쪽 수납공간에 넣어 놓는다.


가방 뒤쪽에 항상 넣고 다니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검은 수첩이다.




대학생 시절, 학교 맞은편에 있던 대형 문구점에서 산 것이다. 까만 인조 가죽으로 표지를 덮고 안에 줄이 그어져 있는 하얀 종이들이 가득 채워져 있는 평범한 수첩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그곳에 내가 좋아하는 시들을 적어놓기 때문이다. 갖고 다닌 세월이 오래된 것에 비해 적혀 있는 시가 많지는 않다. 약 마흔 편 정도.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수첩에 적는 수고를 감수할 만큼 심금을 울리는 시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테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몇몇 고비를 넘길수록 나는 거칠어져 간다. 매정해지고, 냉소적이게 되고, '합리적'이게 된다. 시가 시로 보이지 않게 되고, 그저 글 뭉치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수첩은 아직 초반부밖에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들고 다니기는 항상 들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 날 휘어잡을 '글'을 보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 있다.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아무런 미래도 그려지지 않는 날. 삶이 그저 과제와 의무의 연속처럼 느껴지는 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 잠만 계속 자게 되는 날. 억지로 잠을 깨우고, 책상에 앉으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다스리기 위해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한다. 하지만, 명상은 범인을 위한 수양이 아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키기 일쑤다. 그때, 나는 크로스백 뒤쪽 수납공간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 펼친다.


가장 먼저 보이는 시는 가을과 은행에 관한 시이다.


글자가 삐뚤빼뚤한 것은 당시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것이리라. 알아보기 쉽진 않지만, 수백 번도 넘게 본 서문은 글자를 인식해 뜻을 이해한다기보다는 글자라는 그림을 보고 감상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읽힌다. 가을, 은행나무 아래 낙엽을 바라보며, 중력이 빚어낸 장관이 겨울임에도 눈앞에 선하다. 샛노란 비. 그 아래 선 사람. 저항할 수 없는 중력에 온몸을 맡기며 예술로 생을 마감하는 이파리, 이파리. 이 시가 그때의 나를 울린 이유는 무엇일까. 막 낙엽 떨어지던 시절이었기에? 아니면 노란 비가 쏟아지는 풍경을 그려낸 시인의 문체가 아름답기 그지없어서? 옛 기억을 떠올려 보는 것도 마구잡이로 떠오른 감상 중 하나이다.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기에, 모든 것이 정답이 된다.


다음 장을 펼친다.


두 번째 시는 서귀포라는 지명의 유래와 관련된 설화를 시로 그려낸 작품이다. 조금 더 작은 글자로 적혀 있다. 이 시는 수첩에 적혀 있는 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시이다. 돌아갈 곳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작품이다. 이 시를 베껴 쓸 때의 상황이 기억난다. 대학생 시절,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이다. 막 코로나가 시작되어 학교는 모든 수업을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했다. 외출을 삼가며 집에만 박혀, 간간이 학교 수업만을 들으며, 공시 준비를 이어 갔다. 외롭고 고달픈 시간들이었다. 합격할지 안 할지 모를 시험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써야 했고,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시작한 대학 생활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야말로 주객전도의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서울에서 행복하지도 못한 채. 외딴섬에 갇힌 조난자처럼 감정을 삭이며 시를 필사했던 것 같다.


그때 그토록 원하던 것들 중 몇몇은 이루어냈다. 공시에 합격해 당당히 서울시 공무원이 되었다(얼마 안가 그만둬 버렸지만). 그리고 돌아갈 곳이 없다고 느끼지 않도록 이젠 아예 고향에 눌러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시를 읽으면 나는 깊은 감상 속으로 조용히 빠져들어 간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채울 수 없는 간극을 관조한다. 고요 속에서 그 안에 모래알과 파도 소리와, 조개껍데기를 집어넣는다.


바다의 노래를 들으며.

마음에 묻은 오물을 파도에 흘려보낸다.


이 수첩의 표지는 새까만 타르 색이다.

가장 맑은 물도 쌓이고 쌓이면 현무의 색이 된다. 이런 나날들이 수첩엔 차곡차곡 쌓여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강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