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차 맛을 모른다.
물을 끓인다. 이번엔 녹차다. 뜨거운 물을 부은 컵에 녹차 티백을 담고 우려낸다. 적정 시간은 2~3분 내외. 그 시간을 넘겨 버리면, 지나치게 많은 카페인이 우러나올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지금은 카페인의 힘이 절실할 때이므로. 뇌를 깨워야 한다.
전역 후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게선 연락이 왔다. 다행히 그전만큼 그 빈도가 잦지 않았다. 또한 전화보다는 메시지를 남겨놓는 경우가 많았다. 스물 중반까지는 누군가가 남겨 놓은 메시지를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렘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증오와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누군가의 연락에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정말로 시간엔 모든 것을 치유해 주는 힘이 있었다. 그저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어느 정도 치유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또 한 번 메시지를 받았다. 그때 일에 대한 사과를 구하며 잘 지내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메시지였다. 이제 정말 그때의 미움과 이별할 때가 왔다는 것을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된 메시지가 오더라도 가슴 졸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괜스레 울적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후련함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 시간의 치유는 망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축복이며 동시에 저주인 것.
새해가 막 밝아왔을 무렵. 아빠가 내게 물었다. 그때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내냐고. 나는 그 애를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대답했다. 아빠는 더 묻지 않았다. 나는 위선적인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앞으로도 나는 누군가를 친구로 생각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저 어떤 일을 함께 겪어낸, 같은 또래의 '누군가'로 인식할 뿐. 그때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아이를 위로해 주는 것이 어떠냐고.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저 시간이 또다시 오묘한 조화를 부리기만을 바랄 뿐.
찻잎을 우려낸다. 솥에서 덖어지며, 향기를 한껏 머금은 아파리들은 분쇄되어 부직포 티백에 담겼다. 뜨거운 물속에서, 길 잃은 미아처럼 우는 찻잎들이 빙그르르 돈다. 차를 마시기는 하지만, 나는 차 맛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차를 마시는 행위에 어떤 마법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긴장을 가라앉히고,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든가. 미움을 증발시키고, 끈적끈적한 무언가, 이를테면 여전히 우리 앞에 진득하게 펼쳐진 무한한 생명의 연쇄와 언덕처럼 쌓여 버린 기억들만 남게 한다든가. 결국 인간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고, 그건 바로 역시나 사랑임을 알게 한다든가.
사랑의 반대말인 미움은 그래서 찻잎이 빙그르르 춤을 추는 시간엔, 사라진다. 아스라이 시간의 뒤안길에서 외롭게 희미해진다. 수 천 년. 차의 역사가 오래 이어진 것은 그것이 기막힐 정도로 맛있는 음료여서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인간의 믿음 덕분이다.
마지막 모금, 차를 마시며. 누군가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는 일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이젠 밉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진 않는다. 누군가와 나 사이에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희미해지기만 할 것이다. 그토록 내가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라곤 그저 울고, 괴로워하고, 저주하던 것뿐. 시간에 대한 신앙이 나를 구원했으니. 앞으로 그때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할 일 없을 것이다. 이렇게 결론짓고 마무리 짓자.
그러니까 발단은 그거였다.
학벌지상주의. 반 석차, 전교 석차. 포트폴리오와 상장들. 정시와 수시. 고졸과 대졸. 대학 졸업장.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줄 세우는 수많은 기준들.
절정이라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클라이맥스는 누군가의 울음과 나의 고통이었다. 클라이맥스를 길게 끌어가던 것은 나약한 내 영혼. 그 고통을 애지중지하며, 놓지 못하던 나약함이 그토록 오랫동안 이 연극을 상연하게 만들었으니.
결말은 그런 것이다. 역시 시간은 우리 모두를 치유할지니. 찻잎은 시간을 수행하며 우리를 팔팔 끓게 할지니.
일 월, 한겨울.
한껏 뜨겁게 우려낸 차 한 잔에서 기적이 피어오른다.
미움이 떠나간 자리에, 차 나무가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