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겨울방학
윈터스쿨 3일 차.
공부하는 것 자체는 별로 힘들지 않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내 실력을 키우는 데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한 시간, 두 시간이 훌쩍 지나 해가 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가장 힘든 시간은 밤 11시 이후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즉 잠드는 시간이다. 하루 종일 바깥과 완전히 고립되어 공부하고 난 뒤 쉬어야 할 시간에, 편하고 아늑한 집이 아닌 허름하고 낡은 기숙학원 숙소라는 사실이 괜스레 서러워지고 툭 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다행이다. 일과 중 공부하는 데 서러워지고 힘들어지는 것보다 꾹꾹 참았다가 밤만 되면 집에 가고 싶어지는 게 백 배는 낫다. 왠지 퇴소하는 날 엄마 아빠 얼굴을 보면 진짜 울지도 모른다.
아주 신앙 캠프가 따로 없다.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편히 쉴 곳도 없어서 틈만 나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해댄다. 여기 온 사흘 동안 평소의 한 달 치 기도를 한 것 같다.
약 먹는 게 즐겁다 별로 아픈 것도 없고 그냥 억지로 만든 루틴이지만 조금이나마 원동력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 먹는 게 즐거운 게 아니고 그 루틴을 기다리며 이행하는 것 자체가 즐겁다. 뭔가 이런 잡스러운 것에 신경 쓰다 보면 힘든 걸 잠시라도 잊게 된다.
자꾸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것 같은데, 불평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고자극을 하나 찾았다. 얼굴에 알로에 미스트를 쫙 뿌리면 시원하다. 자극에 무뎌지면 안 되니 하루에 한 번만 뿌리겠다.
외로워서 이 일기를 자꾸 펼치게 된다. 어디 이런 심정을 털어놓을 데가 이 일기밖에 없다. 현재 시각 오후 2시 24분. 확통을 다 하고 이제 생윤을 공부하려 한다.
집에 가고 싶다.
선생님들과 상담을 여러 번 했는데 우선 다행인 건 생각했던 것만큼 빡빡하고 무서운 샘은 없고 다들 친절하시고 장난기가 많으시다.
누가 내 이런 노력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서울대 못 가면 진짜 억울할 것 같으니 퇴소한 뒤에도 1년 동안 잘해보자.
저녁을 먹고 와서 또 일기를 펼쳤다.
마음은 외롭고 할 말은 많은데 종이에 공간이 부족하다.
퇴소일을 2월 7일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건 1월 4일에 입소한 학생들 이야기였고, 나와 현우는 일주일 늦게 들어왔으니 2월 13일 퇴소다. 여기에 갇혀 지내야 할 시간이 일주일이나 더 늘었다니 절망적인 소식에 그나마 남아있던 의지력과 인내심이 바닥나 간다. 어쩌면, 너무 힘들어서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 퇴소할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몰입해서 공부를 잘했었는데 오늘은 생각이 많아진다. 평소 감정적이지 않던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 감정 기복이 심해졌음을 느낀다. 수만휘 기숙학원 로비에 이전 재수생들의 영상이 반복 재생된다. 수능 날, 수능을 끝마치고 돌아오며 기다리던 부모님과 수험생들이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별로 그리 감격적으로 연출된 영상이 아니었음에도 무심코 보다가 그 자리에서 울 뻔했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하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외롭고 갑갑한 기숙학원에 오랫동안 있으려니 하루 종일 생각나는 게 글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하루 한 편 일기 쓰기가 이곳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 됐다는 뜻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기숙학원에서 쓴 이 기록을 다시 읽게 되면, 아니 이 새끼 지가 지 발로 들어가 놓고 왜 이렇게 정성스럽게 찡찡대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곳에서의 일기는 평소 일기와 결이 조금 많이 다르다. 평소 일기는 단순히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간단하게 생각을 적는 것이었다면, 여기서 쓰는 일기는 머릿속을 어지르는 수많은 감정과 걱정들을 정리하고 해소하는 것이다. 전에 교과서인가 어디서 글을 쓰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이해를 못 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이해된다. 머리가 복잡할 때 그 생각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써보면(어찌 됐든 글은 구어보다 논리적이고 맥락이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하므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 근데 어차피 여기서 쓴 글들, 집에 가서 일일이 컴퓨터로 옮겨야 한다. 고된 노동이 필요하겠는걸.
매 쉬는 시간마다 대운동장에 나가 운동장을 한두 바퀴 정도 걷는다. 그리 여유로운 건 아니고,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나가 운동장을 한두 바퀴 걸으면 다음 교시 예비종이 친다. 종소리는 이충고랑 똑같은 것 같다. 지금 이 일기를 쓰고 있는 시각이 오후 8시 8분인데, 지금부터 해서 퇴소하는 날까지 운동장을 100바퀴 넘게 돌 거고, 한 바퀴 돌 때마다 매일 새로 기록하겠다. 오늘이 3일 차이므로 퇴소까지 약 32일 정도 남았고, 내일부터 하루에 세 바퀴씩 돈다 해도 96바퀴는 돌게 되는데, 실제로는 하루에 세 바퀴보다 훨씬 많이 도므로 적어도 120바퀴는 돌지 않을까 싶다. 시골이라 주위에 높은 건물도 없고 공기도 좋고 밤에는 별도 잘 보인다. 5주 동안 운동장 몇 바퀴 돌았는지 세는 (그런 쓸데없는)걸 왜 하냐고? 말도 마라, 이것이 이곳의 몇 없는 낙이다.
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수학 문제를 푸는데 막히는 문제가 나왔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안 풀린다. 문제는 단순하다. 7개의 문자 a, a, b, b, c, d, e를 일렬로 나열하는데, 같은 문자는 이웃하지 않도록 하는 경우의 수를 구하라고 한다. 내 풀이는 이렇다. 우선 c, d, e를 먼저 배열하고(3!=6), 그 후 배열된 세 문자 사이 네 개의 빈 곳 중 두 공간을 골라 a 두 개를 배치한다(₄C₂=6). 그럼, 먼저 배치한 c, d, e와 나중에 배치한 a, a까지 총 다섯 개의 문제가 배치되는데, 마지막으로 다섯 개의 문자 사이 여섯 개의 빈 곳 중 두 공간을 골라 남은 b 두 개를 배치(₆C₂=15)한 후, 지금까지 나온 경우의 수들을 다 곱하면 540(=6×6×15)이 나온다. 음, 이런 망할! 선지에 540이 없다. 뭐가 문제인 걸까? 어디서 오류가 생긴 걸까? 확통은 처음이라 그런지 어렵다.
오늘은 좀 많이 힘들었나 보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없는데, 마음이 항상 무겁다. 쉰다는 느낌이 없다. 쉬는 시간에도, 취침 시간에도 맘 편히 쉬지 못하고 항상 긴장한 채로 언제 울릴지 모를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몸도 마음도 편하게 늘어져 있을 틈이 없다. 정말 힘든데 어디 말할 곳도 기댈 곳도 없어 글로 쓰다 보니 좀 일기를 길게 쓰게 됐다. 근데 힘들다 힘들다 하니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이제라도 마음 다잡고 내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해보자. 집중해서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 있는 경험은 어제 해봐서 알잖아.
이제 11시니 숙소로 돌아가 자자. 그리고 내일 마음 비우고 다시 해보자.
국어 | 3시간 07분 12초
수학 | 4시간 54분 24초
영어 | 1시간 55분 14초
윤리와 사상 | 1시간 20분 36초
합계 | 11시간 17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