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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주는 자존감 Part. 2

Ep.11  오랜만의 자유, 공허함을 치유,  다시찾은 여유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떨어진 자존감과 잃어버린 성취감을 되살리기 위해

예전에 즐겨듣던 일본 음악의 가사를 알아보기 위해


나는 일본어를 공부하기로 했고 

곧바로 JLPT 일본어 능력 시험에 응시했다. 

몇 만 원의 응시 비용조차 결제를 망설이게 만들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가벼워졌지만

날짜를 받아놓고 공부를 해야 게으름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N1이 제일 어렵고, N5가 제일 쉬운 레벨인데 과감하게 N4를 선택했다.

어차피 처음이라 난이도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목표가 숨이 찰 듯 말 듯 해야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 한 단계를 건너 뛰었다. 

제일 쉬운 레벨을 도전하는 것은 원하는 성취감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집안 살림을 책임지며 틈틈이 시간을 내어 즐긴다는 느낌보다는

스스로 시험에 들게 함으로써 전투적으로 여가 생활을 맞이하고 있었다. 

조금 편안하게 준비해도 좋으련만 생각과 몸은 다르게 반응한다.

내려놓는 것이 아직 서투른 것으로 보아 은퇴 후의 생활도 연차에 따라 

초짜와 베테랑이 있으려니 생각했다. 

나는 1년 차, 미련이 많이 남아있는 초짜다. 


사실, 공부를 시작한 여러 가지 이유를 언급했지만 가장 원했던 것은 

무능함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집에 있는 것 자체가 나락에 떨어진 것 같은 씁쓸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경제적인 가치도 없고, 미래에 어떤 도움이 될지 근거도 없는 시험이지만

합격을 통해 아직 살아있다고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나에겐 그만큼 간절한 프로젝트인 것이다.


아이의 문제집을 사러 서점에 가는 날, 일본어 교제 하나를 구매하고 틈틈이 공부를 했다.

때때로 책이 주는 강력한 수면 효과에 직면할 때면, 일본어 강사가 나오는 유튜브를 보며 극복했다.

집안일을 하거나, 자전거로 마트에 다녀올 때, 꾸준히 이어폰을 귀에 꼽고 예문을 반복했다.

역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능률이 오른다는 것은 진리다. 

의도적으로 일본 뉴스를 보거나, 아이들에게 일어로 얘기하고 뜻을 알려주며 한 번 더 외웠다.

그리고, 그 시절 듣던 노래들도 다시 감상하며 회상에 빠져있기도 했다.

가끔 아는 단어라도 하나씩 튀어나오면 미소가 번지며 자신감이 상승했다. 

한 번은 운전을 하며 예전 음악을 듣다가 짧은 한 문장이 통째로 귀에 들린 적이 있었다.


微笑む君が見ていたい (호호에무 키미가 미테이타이)

미소 짓는 그대가 보고 싶어


청소년기에 듣고 마음에 들어 발음만 외워서 따라 부르던 노래였는데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서야 뜻을 알게 되었다.


포기했던 문제를 오랜 세월이 흘러 해결한 느낌이었을까?

잃어버린 형제를 오랜 세월이 흘러 재회한 느낌이었을까?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의 나를 잠시 만난 기분이 들었을까?


저 짧은 노랫말이 자연스럽게 해석되는 순간, 복받치는 감정에 눈물이 흘렀다고 하면 

공감해 줄 사람이 과연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이 없다. 나의 글은 멀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기분이 드는 건 태어나서 처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후, 여러 노래의 가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대가 옆에 있어 행복하다'라던가

'그대를 또 만나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등의 가사를 알게 되면서

사랑 노래는 다 비슷하다는 부분에서 동질감이 들었다. 


시간을 쪼개어 공부했다기보다는 생활 속에 녹여 즐겼고, 3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여름날의 일요일,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며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교문, 학교, 교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전부 감회가 새로웠다.

책상에 앉았을 때는 살짝 긴장도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선생님들에게 다양하게 맞은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어린 친구들이었다. 모두가 유학이나 취업을 준비 중인 듯 보였다.

나이가 비슷한 사람은 한 명 정도가 눈에 띄었는데 '저 사람은 왜 여기 온 걸까' 매우 궁금했다.

그러나,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실례가 되는 질문이기도 했고 

반대로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묻는다면, 그동안의 과정을 짧게 설명할 재주가 없었다.

'힘내요 아저씨' 

혼잣말로 스스로와 그 사람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책을 펼쳤다.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본 단어가 그대로 출제되었던 학생 때의 경험을 다시 재연하고 싶었다.

겉으론 의연한 척했지만 조금은 산만한 듯 여러 가지 잡념 속에 시험시간을 맞이했다. 

두툼한 시험지를 받아들자 긴장감이 차오르고 빨리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올라가기에 시간 안배가 중요했다. 이것마저 감회가 새로웠다.

중간중간 모르는 문제도 있었지만 객관식은 누구에게나 야릇한 기대감을 준다.

듣기 평가는 연인 사이의 노래 가사 같은 낭만을 살짝 기대했지만 

역시나 손님과 점원의 대화 또는 직장동료 간의 딱딱한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마지막, 긴 지문을 읽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독해 부분에서 나는 합격을 직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읽을 수 있었다. 

독해는 훈련이 거의 안된 상태였는데 스스로도 매우 신기했다. 

타고난 능력이라기보다는 문장 구성이 너무 쉬웠다.

이렇게 쉬운 단어로 긴 지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약간의 시건방과 함께 'N4'시험을 보고 있는 동안, 마음은 이미 'N3'로 향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N3'를 응시했어도 괜찮았겠다고 생각했지만, 'N4'부터 시작한 것이 훨씬 장점이 많았다.


나는 '합격'이라는 결과 자체가 필요했다.

멋진 아빠이자 남편임을 보여주고, 스스로도 자신감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일 쉬운 단계는 이미 건너뛴 상태이기 때문에 나름의 명분도 있었다.


웃으며 시험장을 나왔고, 웃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한 달 뒤 결과가 나왔고,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여유 있게 커트라인을 넘기며 합격했다.

무언가를 이룬 적이 언제였던가? 스스로가 대단해 보였다.


합격의 결과는 다양한 부분에서 삶의 질을 올려주었다.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침에도 1타 강사인 양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단어 암기 방법을 알려주었을 때도 아이들의 잘 따라왔다. 나에 대한 신뢰도 상승 덕분이다.


가장 뜻깊은 삶의 변화는 꿈이 생기고,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일본어의 수준을 올리겠다는 단순함을 넘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도전해 봐야겠다는 의지가 샘솟는 것이다. 

축 처져있던 어깨가 다시 서서히 올라간다는 느낌 자체가 삶의 활력이 되었다.

'이게 뭐라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어디다가 써먹으려고' 따위의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온라인으로 결과를 확인할 당시의 화면이다.

나에겐 인생의 흐름을 바꿔준 계기가 된 소중한 첫걸음의 표식이다. 

지금은 저 당시에서 조금 더 진화되어 있고, 달팽이 걸음으로 느리지만 계속 전진하고 있다.


남은 인생에 아쉽거나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다른 분야에도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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