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는 왜 가난할까?

내 인생의 제비를 기다리는 당신에게 권합니다 - <흥부전>

by 박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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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흥부같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썩 기분 좋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착하고, 순박하다'라는 느낌보다는 '무능하고 가난하다'라는 흥부의 이미지가 현대사회엔 만연해있지요.

작품에서 흥부는 돈을 벌기 위해 매품을 팔러 병영에 갑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흥부를 ‘큰 부자’라고 하지요. 매를 맞기 위해서 서로 자기가 더 가난하다고 다투는데 잠시 볼까요?


내 가난 들어 보오. 집이라고 들어가면 사방 어디로도 들어갈 작은 곳이 없어 닫는 벼룩 쪼그려 앉을 데 없고, 삼순구식(三旬九食) 먹어 본 내 아들 없소… 내 가난 들어 보오. 사발에 음식을 담은 지가 팔 년이고, 부엌의 노랑 쥐가 밥알을 주우려고 다니다가 먹을 것이 없어 드러누운 지가 석 달 되었소… 내 가난 들어 보오. 집에서 누우면 상투와 궁둥이가 집 밖으로 삐져나오고, 집에 연기 나지 않은 지 삼 년째 되었소.



이 ‘가난 자랑’ 장면은 참으로 웃기고도 슬픕니다. 이들의 하소연을 들은 흥부는 결국 매품 파는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지요.


2014년,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책이 있습니다.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인데요. 지난 3세기동안 20개국의 경제적, 역사적 데이터를 수집해 쓴 이 책에서는 저자는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우위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흥부전」을 통해 생각해 보죠. 흥부는 물려받은 땅도, 돈도 없었습니다. 그가 돈을 벌어올 수단은 오로지 ‘몸’뿐이었습니다. 방아 찧기, 나물 캐기, 멍석 맺기, 매품팔이 등으로 흥부 가족은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요.


이 노동으로 흥부는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소리’가 들렸습니다. 둥지 속 배고픈 새 새끼들이 입 벌려 지저귀듯, ‘국수 말아 먹었으면…’, ‘개장국에 흰밥 조금 먹으면…’, ‘대추찰떡 먹었으면…’ 하는 굶주린 자식들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죠.


반면 부모의 재산을 독차지한 놀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부모의 재산은 형제들이 고루 나눠가졌습니다. 여성들 역시 공평하게 자신의 몫을 받았지요.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혈연 공동체 의식이 확대되고,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제사를 담당하는 장자(長子)를 우선시하는 풍조가 퍼집니다. 재산 역시 장자상속으로 바뀌어 가지요.


“어떤 사람 장손으로 태어나서 죽은 조상 제사 모신다고 호위호식 잘 사는데, 누구는 버둥대도 이리 살기 어려울까. 차라리 나가서 콱 죽고 싶소.”라는 흥부 아내의 하소연을 통해서도 이런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의 유산을 통해 놀부는 이미 생산 수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토지’와 ‘돈’이지요. 토지에선 매년 쌀이 수확됩니다. 돈은 땅을 더 사거나, 이자를 받을 수 있게 해줍니다. 이미 부자였던 놀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부자가 되었지요. 땀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요.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이앙법이 보급되고 농업 기술이 발전합니다. 이와 더불어 생산력 또한 급격히 증가했지요. 땅을 가진 일부의 농민은 부농(富農)으로 성장하지만, 대다수의 농민들은 자기 경작지를 잃고 소작농이 됩니다. 혹은 일용직 노동자, 화전민, 유랑민 등으로 전락하기도 했지요. ‘우리 부부 품이나 팔러 갑시다.’라는 흥부의 말에는 이들의 어려운 처지가 잘 반영되어 있답니다.


이제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이 이해될 겁니다. 노동을 통해 벌어들이는 소득보다 자본, 그 자체를 활용해 벌어들이는 소득이 훨씬 크다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돈이 돈을 불러오는’ 셈이지요.


현대 사회에 이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합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고액의 예금을 가진 부자는 배당, 임대료, 이자를 받으며 통장의 잔고를 점점 더 불려갑니다. 하루 12시간 동안 편의점에서 바코드를 찍거나,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다 해도 그 속도를 쫓아갈 수 없지요.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격차가 줄어든 건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뿐이며, 현대에 올수록 그 차이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다.”는 피케티의 진단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의 분배는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선거철마다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흥부전」에서는 ‘제비’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가난한 흥부에겐 재물을 가져다주고, 욕심 많은 놀부에게선 부당하게 모은 재산을 취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평등을 이루지요. 흥부는 참으로 운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제비는 있을까요? 글쎄요. 분명한 건 모두가 흥부처럼 운이 좋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들 로또에 당첨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제비가 우리 집에 오길 막연히 기다리기보단 우리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요. ‘누구나 노동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나눔의 문화를 확대하고 극빈층이 생기지 않도록 복지제도를 강화하는 것. 누구에게나 폭넓은 교육 기회를 제공해 꿈과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돕는 것.’ - 이런 사회가 되도록 많은 이가 노력할 때 진정한 ‘제비’는 우리 곁으로 다가오겠지요. ‘개인의 요행을 기다리기보다 이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라는 것’ - 이것이 오늘날 「흥부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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