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아침부터 변기 물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뭔가 막힌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뚜껑을 덮어놓고 다른 화장실로 갑니다. 하지만 가족 모두 한 곳을 쓰려니 불편하네요. 며칠 뒤 조심스레 변기 물을 내려봅니다. 하지만 그대로입니다. 물을 내려도, 꼬르륵 소리만 나고 다시 흘러넘칩니다. 고쳐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공사, 배관, 수리 - 이런 건 저에게 양자역학, 케플러 법칙, 리만 가설과도 같습니다. 아는 게 전혀 없기에 무조건 사람을 불러야 하지요.
네이버, 당근, 숨고 등 작업자를 찾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눈탱이(?) 맞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안 좋았던 기억이 많습니다. (에어컨 설치, 싱크대 막힘, 자동차 미션 등) 예상보다, 원래보다 비싼 가격을 지불했던 씁쓸한 기억이지요.
검색을 통해 여기저기 알아보고 전화로 예상 견적을 묻습니다. 하지만 변기가 막힌 원인에 따라 다르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니 믿을 수 밖에요. 그 중에 제일 리뷰가 많은 곳에 연락해 약속 시간을 잡습니다. 전화를 끊으니 학창시절에 읽었던 한 작품이 떠오릅니다.
"사장님, 여길 보세요. 욕조가 끝나는 자리부터 질퍽하지요? 제대로 찾아낸 겁니다. 이 부분에서 세면대까지의 사이에 하자가 생긴가 분명해요."
적게 보면 서른여덟, 많이 보면 마흔쯤으로 보이는 임씨가 사장님으로 부르는 소리에 그는 얼떨떨했다. 사장님은 커녕 여태도 말단 사원인데 이 사람은 집주인은 무조건 사장님으로 부르기로 내심 통일시킨 모양이었다.
"어허, 사장님요 나쁜 자식들 좀 보세요.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이건 BS표보다도 아랫질예요. 덤핑 제품이죠. 돈도 몇 푼 차이 안나는 데도 집장수녀석들 심뽀는 꼭 이렇다구요."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은 총 11편의 연작 소설입니다. 1980년대의 경기도 부천시를 배경으로 하며, 제목인 원미동(遠美洞)은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를 뜻하지요. 이 소설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지금도 수록되어 있으며, 하나하나가 명작입니다. 그 중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가 떠올랐습니다.
원미동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혜네 집은 고장 나기 시작합니다. 천장에 물이 새고, 주방 하수구가 막히고, 보일러 굴뚝이 무너지고 자물쇠 보조키까지 말을 안 듣지요. 서울에서 오랫동안 전세로 떠돌다가 겨우 연립 빌라 한 채 사서 온 그들에겐 불운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할아버지가 찾아와 은혜네 목욕탕에 문제가 생겨 자기 집 천장에 물이 샌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순 없지요. 은혜네는 수리해 줄 사람으로 임씨를 소개받습니다. 그는 원래 연탄장수인데, 연탄이 안 팔리는 여름에는 이런 일도 한다고 들었지요. 젊은 조수까지 데리고 온 임씨는 본격적으로 수리를 시작합니다.
... 임씨 말대로라면 당일로 끝낼 속셈은 아닌 듯싶었다. 젊은 인부는 삼십 분쯤 일하고 나면 담배 한 대에 냉수 한 컵 하는 식으로 일을 질질 끌고, 젊은 녀석 단속하랴 자신이 하는 일에 신경 쓰랴 입으로 한몫하랴 임씨 속도도 그가 보면 더디기 짝이 없었다. 하기야 뭐 이런 공사가 국수가락 뽑아내듯 쑥쑥 뽑혀나오는 재미를 주는 일이야 아니겠지만 깨고 들어내고 긁어대고 하는 일은 한참 후에 들여다보아도 그게 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감독관마냥 문 앞에 버티고 서서 잔꾀 부리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는 어슬렁거리며 집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왔다갔다 하지만 말고 가서 지켜보세요. 일꾼들이란 원래 주인이 안 보면 대충대충 덮어 버리는 못된 구석이 있다구요."
시금치나물을 무치면서 아내가 행여 들릴까 봐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은혜네 부부는 저처럼 걱정 많았나 봅니다. 수리가 제대로 되고는 있는지, 오늘 내로 과연 끝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허름한 행색의 임씨가 과잉 견적을 뽑은 건지 의심도 됩니다. 그렇기에 부부는 임씨를 지켜보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변기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수리기사 근처를 어슬렁거렸습니다. 기계로 변기 물을 퍼내고, 내시경 카메라 넣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그렇게 옆에 있으면 덤탱이(?) 씌우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요. 예전에 모 타이어 가게에서 멀쩡한 타이어를 고의로 파손시켰다는 뉴스를 본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괜한 의심은 싫지만, 그간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무턱대고 맡겨놓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완전 삭았어요. 사장님, 어서 계량기 잠그세요. 터진 데 찾았으니 일은 다한 거나 마찬가지라구요."
임씨는 젊은 인부를 기다리는 사이 아내에게 냉수를 한 컵 청했다.
일을 다한거나 진배없다는 일꾼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아내가 청량음료를 한 컵 가득 따라 주며 다짐했다.
"세면대나 변기는 손댈 것 없겠지요?"
"예, 사모님. 다른데 파이프는 구부러지게 이을 필요가 없거든요.”...... <중략>
"그럼, 돈 계산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 사람 처음에는 목욕탕을 다 뜯어 발길 듯이 말하잖았어요? 견적도 그렇게 뽑았을 거예요. 이십만 원이 다 되는 돈 아녜요?"
아내의 말을 들으니 딴은 중요한 문제이긴 했다. 목욕탕 공사야말로 하자 없이 해야 한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들먹이며 임씨가 빼놓은 견적은 욕조와 세면대 사이의 파이프만 교체하는 수준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당신이 지금 가서 따져 봐요. 저런 사람들 돈이라면 무슨 거짓말을 못 하겠어요. 괜히 견적만 거창하게 뽑아 놓고 일은 그 반값도 못 미치게 하자는 속임수가 틀림없어요.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공사판 내용을 다 알겠어요. 이렇다 하면 그런갑다 하고 믿는 게 예사지." 아내는 애가 달았다.
은혜네 집에 물 새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파이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죠. 다행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진 않습니다. 원래는 목욕탕 전체 수리를 생각하고 견적을 받았는데, 파이프만 교체한다면 비용이 훨씬 적게 들테니까요.
은혜 엄마는 난리입니다. 간단하게 고칠 수 있는 건데도, 과한 견적을 받아 바가지 썼다고 생각합니다. 벌써부터 사기꾼에게 속은 기분입니다. 은혜 아빠 역시 걱정이 앞섭니다.
“사장님! 이리 좀 와보세요.”
변기를 뜯고 이리저리 살피던 수리기사가 저를 부릅니다. 냉큼 달려갔습니다.
“정심이 문제네요. 이게 틀어져서 물이 안 내려갔던 겁니다.”
수리기사는 문제의 원인을 찾아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군요.”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심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쯤이야 당연히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지요.
“차에 가서 부품을 가져와야 할 것 같네요. 잠시만 계세요.”
수리기사가 나갑니다. 그 틈을 타 얼른 검색해봅니다. 정심은 고무패킹 같은 건데 변기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나 봅니다. ‘변기 정심 가격’, ‘변기 정심 교체 비용’ 같은 것도 열심히 검색해 봅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지요.
... "됐습니다, 사장님. 이게 말입니다. 처음엔 파이프가 어디서 새는지 모르니 전체를 뜯을 작정으로 견적을 뽑았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일이 썩 간단하게 되었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노임에서 4만원이 빠지고 시멘트도 이게 다 안 들었고, 모래도 그렇고, 에, 쓰레기 치울 용달차도 빠지게 되죠. 방수액도 타일도 반도 못 썼으니 여기서도 요게 빠지고 또... 그렇게 해서 모두 7만원이면 되겠읍니다요."
선언하듯 임씨가 분홍 편지지를 아내에게 내밀었다. 놀란 것은 그보다 아내 쪽이 더 심했다. 그녀는 분명 7만원이란 소리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7만원요? 그럼 옥상은‥‥‥" "옥상에 들어간 재료비도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거야 뭐 몇 푼 되나요." "그럼 우리가 너무 미안해서 ‥‥‥"
아내가 이번에는 호소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할 수 없이 그가 끼어들었다.
"계산을 다시 해봐요. 처음에는 십팔만원이라고 했지 않소?" "이거 돈을 더 내시겠다 이 말씀입니까? 에이, 사장님도. 제가 어디 공일 해줬나요. 조목조목 다 계산에 넣었읍니다요. 옥상 일한 품값은 지가 써비스로다가‥‥‥"
"써비스?"
은혜네 집 수리가 끝난 건 늦은 밤이었습니다. 임씨는 목욕탕을 고친 뒤 옥상까지 전부 고쳐 주었지요. 거기에 들어간 시간과 노력, 재료는 적지 않았습니다. 노심초사하는 은혜 부부에게 임씨가 내민 건 애초에 견적으로 잡았던 18만원보다도 훨씬 적은 7만원짜리 견적서였습니다.
그걸 보면서 은혜네 부부는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임씨가 엉터리 일꾼은 아닌지, 일부러 견적을 훨씬 많이 뽑은 게 아닌지 의심했던 자신들이 말이지요. 일이 끝나고 남편은 임씨를 동네 슈퍼로 데려가 맥주를 삽니다. 그리고는 임씨의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되지요.
“.... 자그마치 팔십만원이오, 팔십만 원. 제기랄. 쉐타 공장 하던 놈한테 일년내 연탄을 대줬더니 이 이 연탄값 떼어먹고 야반도주했어요. 공장이 망했다고 엄살을 까길래, 내 마음인들 좋았겠오. 근데 형씨. 아, 그놈이 가리봉동에 가서 더 크게 공장을 차렸지 뭡니까. 우리네 노가다들, 출신이 다양해서 그런 소식이야 제꺼덕 들어오지, 뭐.”
"난 말요. 이 토끼띠 사내는 말요, 보증금 백오십만 원에 월세 삼만 원짜리 지하실 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고 있소. 가리봉동 그 새끼는 곧 죽어도 맨션 아파트요, 맨션 아파트!"
임씨는 주먹을 흔들며 맨션 아파트라고 외쳤는데 그의 귀에는 꼭 맨손 아트처럼 들렸다.
"돈 받으러 갈 시간도 없다구.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벽돌 찍는 공장에 나댕기지, 나는 나대로 이짓해서 벌어야지. 그래도 달걀후라이 한 개 마음놓고 못 먹는 세상!”
“나 말이요. 이번에 비만 오면 가리봉동에 가서 말이요‥‥‥" 임씨가 허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목소리도 한결 풀기 없이 쳐져 있다.
"그 자식이 돌만 주면‥‥‥ 돈만 받으면, 그 돈 받아가지고 고향으로 갈랍니다."
"고향엘요."
"예. 고향으로 갑니다. 내 고향으로‥‥‥”
임씨가 연탄 장사할 때 연탄을 대주었던 스웨터 공장 사장이 돈을 떼먹고 도망갔답니다. 형편이 어렵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가리봉동에 더 큰 공장을 차렸다고 하지요. 그렇기에 비가 와서 일거리가 없는 날이면 임씨는 돈을 받기 위해 항상 가리봉동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돈은 “앉아서 빌려주고, 서서 받는다.”고 하지요. 아니, 서서라도 받으면 다행입니다. 받지 못하는, 받을 길 없는 돈도 많습니다. 임씨 역시 돈 받을 길은 요원해 보입니다. 술에 취할 대로 취한 임씨는 세상을 한탄하고, 은혜 아빠는 조용히 술값을 치른 뒤 슈퍼를 나오지요.
정심을 교체하자 변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물을 흘려보냅니다. 다행입니다. 비용을 묻자 인터넷에서 찾아본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더 다행입니다. 그런데 수리기사가 말합니다.
“사장님, 세면대 물이 잘 안내려 가네요.”
“네. 내려가는데 시간이 좀 걸리더라고요.”
“그런가요? 제가 한 번 봐 드릴까요?”
“아, 그래 주시면 고맙지요.”
수리기사는 세면대 쪽에 기계를 대고 뭔가를 빨아드립니다. 그래도 결과가 신통치 않자 아예 무릎을 꿇고 앉아 세면대 해체를 합니다. 시간이 꽤 걸린 것 같습니다.
“이거 청소 한 번도 안 하셨지요? 머리카락이 엄청 많네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15년 넘게 이 집에 살면서 세면대 배수관을 청소한 적 없으니, 당연했을 겁니다.
“세면대가 여기 하나인가요? 안방 쪽은 괜찮나요? 한 번 봐 드릴게요.”
솔직히 그의 제안이 의심스러웠습니다. 단순한 선의라기보단 추가 비용을 받아내려는 목적이 있다고 여겼지요. 하지만 수북이 쌓인 머리카락, 이전과 달리 거침없이 내려가는 세면대 물을 보면서 ‘좀 더 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방 세면대 역시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수리기사는 그곳 역시 싹 뜯어내고 배수관을 열심히 빨아들였습니다. 양쪽 세면대를 개선하는 데 변기 수리보다도 시간이 더 걸린 것 같습니다.
“얼마지요?”
제가 조심스럽게 묻자 수리기사는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냐는 듯 의문의 표정을 짓습니다. 추가비용 같은 건 없었습니다. 금액을 지불하자, 그는 혹시 문제 생기면 다음에도 불러달라는 말을 하고는 짐을 챙겨 나갑니다. 그의 낡은 작업복과 검정 슬리퍼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전문가의 손을 거친 변기와 세면대는 잘 길들인 말처럼 아무런 문제 없었지요.
예전에 베란다 방충망을 교체할 때였던가요? 기사분께 들었던 게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작업하는 곳이 많고, 금액도 쉽게 비교할 수 있답니다. 게다가 댓글로 피드백을 받기에 대충 할 수도 없답니다. 생각해 보면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무난했던 것들은 희한하게도 잘 기억에 남지 않지만요.
Be kind.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hard battle.
(친절히 대하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는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문득 이 말이 떠오릅니다. 아까 왔던 수리기사에게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저는 모릅니다. 어쩌면 그가 임씨처럼 누군가에게 돈을 떼였는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압니다. 매일 이곳저곳 다니면서 변기나 세면대를 고치는 게 쉽진 않다는 것을요. 물가가 오르고, 사람들 지갑은 얇아지고, 시중에 돈이 풀리지 않아 자영업자가 힘들다는 요즘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보다 친절해야겠습니다. 좀 더 너그러워지고, 마음도 좀 더 넉넉해야겠습니다. 아, 가실 때 음료수라도 좀 챙겨드릴 걸 그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