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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형 Apr 17. 2024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바라보며

<착빙행>

날이 점점 더워집니다.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마십니다. 무엇에 대해 쓸까 생각하다가 컵에 담긴 얼음을 봅니다. 커피를 차갑게 만드는 것. 잠깐의 냉기와 서늘함. 그 얼음을 보며 문득 시가 한 편 떠오릅니다.     





  섣달에 한강이 처음 꽁꽁 얼어붙자                       

  천 사람 만 사람이 강 위로 나와서는                      

  쩡쩡 도끼 휘두르며 얼음을 깎아 내니                  

  은은한 그 소리가 용궁까지 울리누나                  

  깎아 낸 층층 얼음 흡사 설산과도 같아                    

  쌓인 음기 싸늘히 뼛속까지 스며드네                  

  아침마다 등에 지고 빙고에 저장하고                      

  밤마다 망치 끌을 들고 강에 모이누나                     

  낮은 짧고 밤은 길어 밤에도 쉬지 않고                    

  강 위에서 노동요를 서로 주고받네                       

  정강이 가린 짧은 홑옷에 짚신도 없어                   

  세찬 강바람에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듯하네               

  유월이라 푹푹 찌는 여름 고당 위에서는                   

  미인이 고운 손으로 맑은 얼음을 전해 주니              

  칼로 내리쳐서 좌중에 고루 나눠 주면                    

  햇살 쨍쨍한 공중으로 하얀 눈발 흩날리네             

  온 당 안이 더운 줄 모르고 즐거워하지만                 

  얼음 깨는 수고로움을 그 누가 말해 주랴                  

  그대는 못 보았나 더위 먹고 길에서 죽어 가는 백성들     

  그들은 대부분 강에서 얼음 캐던 사람이라네       

                                                              - 김창협, <착빙행>     



추운 겨울입니다. 꽁꽁 언 한강 위로 사람들이 도끼를 들고 나타납니다. 옷은 얇고 제대로 된 짚신도 없는 초라한 행색이지요.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은 쉬지 않고 얼음덩어리를 깎아냅니다. 매서운 강바람에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듯합니다. 냉기는 뼛속까지 스며들지요. 노래를 부르며 고통을 잊으려 해도 너무나 힘겹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오고 싶어서 왔을까요? 그럴 리가요. 관아에서 백성을 동원한 것이지요. 사람들이 깎아낸 얼음덩어리는 빙고(氷庫)라는 창고에 보관됩니다. 서울의 서빙고동, 서빙고역 역시 여기서 유래되었지요. 이런 얼음은 궁중 예식이나 사치품으로, 또는 귀한 선물이나 재물로 취급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푹푹 찌는 한여름입니다. 잔치라도 열렸는지 양반의 넓은 집은 손님들로 왁자지껄합니다. 한 미인이 나타나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칼로 내리쳐 자릅니다. 공중에 하얀 눈발이 흩날리지요. 여인들은 고운 손으로 분주하게 맑은 얼음을 나눠줍니다. 손님들은 더위를 잊고 다들 즐거워하네요. 반면에 대문 밖 거리에선 무더위로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갑니다. 그들 대부분은 지난 겨울, 강에서 얼음 캐던 사람이었습니다.       

    





학창 시절엔 이 시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분석할 만큼 복잡하지도 않고, 과장법 외엔 별다른 표현상 특징도 없었거든요. 게다가 이런 류(?)의 작품은 흔했습니다. 백성은 고통받고, 양반은 호위호식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들.... 이런 작품은 시험에 가렴주구(苛斂誅求),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같은 한자성어와 연관되어 나왔기에 하나의 공식처럼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어른이 된 지금, 카페에 앉아 커피 속 얼음을 바라봅니다. 조금씩 녹는 얼음. 이 사소한 걸 얻기 위해 옛사람들은 살이 에이는듯한 겨울바람을 견뎌야 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작년은 미국 상위 1%가 국가 전체 부(富)의 51%를 가진 최초의 해였습니다. 상위 10%까지 계산하면 전체 부(富)의 80%였다고 합니다. 수업 시간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아 비유를 들었습니다. 교실 30명 중 오직 3명이 의자 24개를 갖고, 나머지 27명은 남은 의자 6개를 돌아가면서 앉는 상황이라고요. “실제로 10분만 그렇게 해 볼까?”라고 묻자 단박에 이해하더군요.     


물론 의자를 한 사람당 하나씩 갖는 것처럼, 세상의 재화를 똑같이 나눌 순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얼음을 똑같이 나눠 먹을 수 없는 현실도 잘 압니다. 세상은 유토피아도, 공산주의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개선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닙니다. 얼음 깨는 이에게는 따뜻한 옷과 적절한 임금을 주고, 얼음을 향유하는 이에게는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도록 해야겠지요. 정부는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없는 안전한 노동 환경이 되도록 관리·감독할 의무가 있고요. 어른으로서 우리는 이런 사회를 만들어 갈 책임이 있습니다.      

고통과 즐거움, 과거와 현재, 사회 구조와 개선 방향 – 그러고 보니 이 작은 얼음에 참 많은 게 담겨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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