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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왜 동생을 해치려 했을까?

두 아이를 키우는 당신에게 권합니다 - 『적성의전』

by 박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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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명만 왕위에 오른다


〈왕좌의 게임〉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일곱 왕국의 통치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그린 작품이지요. 이 드라마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왕좌를 둘러싼 협력과 배신, 갈등과 계략을 흥미롭게 그려 냈기 때문이에요.


세상에는 다들 원하지만 모두 가질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학급 반장 선거에서 6명이 후보로 나오는 경우, 수능 1등급을 상위 4%만 받는 경우가 이에 해당하지요. 그래도 반장이나 1등급 정도는 양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왕의 자리’라면요?


오늘 살펴볼 작품에는 두 형제가 등장합니다. 형과 아우, 둘 중 오직 한 명만 왕위에 오를 수 있어요. 과연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의롭지 못한 항의, 의로움을 이룬 성의


『적성의전』은 연대·작자 미상의 고전 소설로, 중국의 ‘안평국’이 배경입니다. 안평국 왕에게는 두 왕자가 있습니다. 바로 ‘항의(抗義)’와 ‘성의(成義)’. ‘抗’은 ‘겨룰 항’, 成은 ‘이룰 성’이지요. 형은 의로움[義]을 거역하는 인물이지만, 동생은 의로움을 이루는 인물이라는 점이 이름에서 드러납니다.


안평국 왕은 성품이 착하고 온순한 둘째 성의를 세자로 책봉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 신하가 이를 반대해요. 그 당시에는 장자 세습, 즉 첫째 아들이 왕위를 당연히 물려받아야 한다고 여겼거든요. 왕은 고심하다가 신하들 뜻에 따라 첫째 항의를 세자에 봉합니다. 항의 입장에서 동생 성의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던 어느 날, 왕비가 병에 걸립니다. 이때 도사가 나타나서 서역 만 리 청룡사에 있는 일영주가 아니면 병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해요. 참고로 고전 문학에서 ‘서역’은 이승의 끝자락,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곳을 뜻합니다. 이곳으로 가려면 ‘약수’라는 강을 건너야 하는데, 부력이 약해서 깃털도 가라앉는 곳이에요. 약을 찾으려면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모험을 떠나야 합니다. 이에 성의는 먼 길을 떠나고,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결국 일영주를 손에 넣지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만 하면 됩니다.


한편 궁에 남은 항의는 불안합니다. 동생이 떠난 지 반년. 혹시 성의가 약을 구해 온다면 자신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테니까요. 그는 동생 소식을 알아 오겠다며 군사를 이끌고 먼바다로 나섭니다. 그리고 며칠 뒤, 고향으로 돌아오던 동생의 배와 마주치지요.


항의는 성의가 일영주를 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음이 다급해집니다. 동생으로부터 약을 건네받은 항의는 거짓 명령을 내려 동생에게 자결을 요구해요. 그 대목을 한번 볼까요?


“네가 거짓으로 서역에 가서 일영주를 구하여 오겠다 하고 병든 어머니를 잊어버리고 불도(佛道)에 빠졌다가 이제야 돌아오니 어찌 사람의 자식 된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천하의 불효(不孝)라. 어머니께서 너를 보시면 병세가 더하실 것이니 너는 빨리 물에 빠져 아버지의 명을 순순히 받들라.”


이 계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항의는 본색을 드러내며,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성의의 부하들은 목숨을 잃고, 성의 역시 형의 칼에 눈이 찔린 채 바다에 빠지지요. 모든 일을 끝낸 항의는 궁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일영주를 건넵니다. 동생은 불도에 뜻을 두어 스님이 된 뒤 속세를 떠났다는 거짓말까지 보태면서요.


한편 한 조각 널빤지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떠돌던 성의는 무인도에 이릅니다. 그리고 며칠 뒤 그곳을 지나던 중국 사신 ‘호 승상’에게 구출돼 궁궐로 가지요. 맹인인 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사람은 바로 ‘채란 공주’였습니다. 이 둘은 점점 가까워졌어요.


일영주 덕분에 병에서 나은 왕비는 일 년이 지나도 둘째 아들을 잊지 못합니다. 어느 날 왕비는 성의의 방에서 그가 기르던 기러기를 발견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러기의 발에 편지를 묶으며, 기러기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기러기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성의가 있는 곳에 도달하지요.


채란 공주가 편지를 읽어 주자 성의는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북받칩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통곡하던 성의는 눈을 번쩍 뜨지요. 이후 삶은 새롭게 펼쳐집니다. 신분을 밝힌 성의는 과거에 급제한 뒤, 채란 공주와 결혼해서 왕의 사위가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늘 마음에 걸립니다. 결국 그는 황제의 군대를 빌려 고향으로 향하지요. 그 소식을 들은 항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집니다. 동생이 돌아오면 자기가 벌인 일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니까요. 그는 성의가 돌아오는 길목에 매복했다가 동생을 죽이고자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분노한 부하가 외칩니다.


“이 무지한 놈아. 형제를 몰라보고 이렇듯이 지악불량하니, 너 같은 놈을 베어 후인을 경계하리라!”


천륜에 어긋나는 짓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항의는 순식간에 죽고, 성의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모를 만나 그간 있었던 일을 아뢰지요. 세월이 흘러 안평국 왕이 된 성의는 나라를 훌륭히 다스렸다는 내용으로 작품은 끝맺습니다.


형은 왜 동생을 해치려 들었을까?


'항의는 심술이 불측하고 마음이 어질지 못하여 매번 동생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되, 둘째, 성의는 재주가 많고 민첩하며 마음이 어려 효행이 지극하니'


두 형제를 묘사한 작품의 첫 부분입니다. 선악이 뚜렷하게 나뉘지요. 항의는 분명 잘못된 행동을 했고, 인과응보를 겪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항의는 왜 성의를 해치려 들었을까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 보기로 해요.


그전에 한 가지 묻고 싶네요. 여러분에게도 형제자매가 있나요? 만약 있다면,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인지요? 실제로 사람들에게 질문하면 대답은 제각각입니다. “얼굴만 보면 웃음이 나와요.”, “이심전심이에요.”, “맨날 싸워요.”, “아, 말도 마세요. 차라리 벽을 보고 얘기할래요.” 등 무척 다양한 답이 나오지요.


‘여족여수(如足如手)’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제는 몸에서 떼 놓을 수 없는 팔다리와 같다는 뜻인데, ‘서로 간에 친밀하고 정이 두터움’을 의미해요. 그러나 옛말과는 너무 다른 현실을 우리는 봅니다. 형제가 부모의 유산 때문에 다투고, 심지어 소송까지 하는 경우도 있어요. 또 왕래를 끊고 만나지 않는 형제도 많습니다. 주먹다짐하거나 상대에게 상처 주는 일도 다반사고요. 아무리 형제자매 사이라도 늘 친할 수는 없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특성 때문일 겁니다. 인간은 백이면 백, 제각각의 색을 지닌 존재입니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은 똑같은 교복을 입었지만, 생각과 행동이 전부 달라요. 마찬가지로 부모로부터 똑같은 피를 물려받았어도 형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반면, 동생은 활달하고 외향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고요. 인간은 나름의 개성을 가진 존재니까요.


그런데 만약 부모님이 형제 가운데 어느 한쪽만 아끼고 사랑한다면 어떨까요? 혹은 아예 못난 놈, 나쁜 놈으로 취급하면요? 분명 문제가 생기겠지요. 특히 사랑받지 못한 쪽은 소외되고 점점 불행해질 거예요.


『적성의전』에서 항의는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합니다. 왕비는 자신의 두 아들을 두고 극명히 다른 평가를 내리지요. “네 형(항의)처럼 불측하게 행동하는 이는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네(성의) 효성이 지극하니 지성이면 감천이라. 약을 구하러 너를 보내는 게 무척 걱정되는구나.” 등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어요. 아버지 역시 세자 자리를 둘째에게 넘기려 했습니다. 기존 관습까지 뒤엎으면서요. 일련의 사건은 항의에게 크나큰 불안감을 안겨 줬을 거예요. 그에게 동생은 우애를 나눌 형제가 아닌,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존재로 각인되었을 테고요.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길 원합니다. 이 ‘인정 욕구’는 형제간에 강렬하게 일어나지요. 프로이트는 “어린아이에게 형제가 생기는 건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봤습니다. 혼자 독차지해야 하는 부모의 사랑을 빼앗길지도 모르니까요. 누구에게나 이런 본능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부모에게는 편애가 아닌 ‘공평한 사랑’이 요구되지요.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절대적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맺는 관계이자,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만남이에요. 하지만 『적성의전』 어디에도 부모가 항의를 아끼고 예뻐했다는 부분은 없습니다. 아예 대화 자체가 없거든요. 성의의 착한 품성과 올바른 태도를 칭찬하는 부분이 여러 군데 쓰인 것과 비교됩니다. 당연히 항의는 어릴 때부터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꼈겠지요. 그의 마음에 증오심이 싹트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부모의 행동이 과연 옳았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네요.


인정받지 못한 자는 슬픕니다.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인류 역사는 개인과 공동체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일종의 투쟁”이라고 했습니다. 항의에게 이런 ‘인정 투쟁’의 모습이 엿보이는 건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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