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우는 수많은 새엄마를 응원하며 -『어룡전』
“네 어머니 정말 친절하시더라. 갑자기 찾아갔는데 과일도 깎아 주시고, 간식도 많이 주시고….”
“응, 참 좋으신 분이야. 새엄마인데 친엄마 같으셔.”
제가 중학생 때였습니다. 수행평가 때문에 친구네 집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예고도 없이 방문했지만, 친구 어머니는 과자와 음료수, 과일 등을 정성껏 차려 주셨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다음 날 친구에게 말했더니 저런 대답을 들을 수 있었어요.
‘계모(繼母)’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계승한 이’를 뜻해요. 그런데 이 단어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나요? 글쎄요. 아무래도 ‘엄마’처럼 따뜻하고 푸근한 느낌이 곧바로 들진 않을 거예요. 그 어감에는 분명 차이가 있지요. 그래서 지금은 ‘새엄마’라는 말을 대신 쓰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고전 문학을 비롯해 해외 문학, 전래 동화에서 계모를 다룬 작품은 많습니다. 대부분은 계모를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어요. 게다가 뉴스는 친어머니에 의한 자녀 학대보다 새엄마에 의한 자녀 학대를 크게 보도하는 경향이 있고, 이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무척 큽니다.
그런데 새엄마(계모)는 정말로 나쁜 사람일까요? 많은 문학 작품은 왜 이들을 아주 나쁜 것처럼 그릴까요? 『어룡전』을 보며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룡전』은 작자·연대 미상의 소설입니다. 송나라에 ‘어의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나고 명성이 높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살지요.
그는 늦은 나이에 딸을 낳아 이름을 ‘월(月)’이라고 짓습니다. 또 몇 년 뒤에는 아들 ‘용(龍)’도 낳아요.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어룡’입니다. 세월이 흘러 월이 열한 살, 용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어의관의 아내는 세상을 뜹니다. 이후 어의관은 강씨와 재혼하지요. 오누이에게 새어머니가 생긴 셈입니다. 강씨는 남들 앞에서는 오누이를 사랑하는 척하지만, 아들 재룡을 낳자 본색을 드러냅니다. 오누이를 쫓아내겠다는 강씨의 의지는 아주 강해졌어요.
계모가 본처의 자식들을 구박하고 학대하는 모습은 많은 작품에서 나타납니다. 『신데렐라』, 『콩쥐팥쥐전』에서는 미운 자식에게 실현 불가능한 과제를 던져 주지요. 또는 「장화홍련전」이나 『연당전』처럼 처녀의 몸으로 외간 남자와 몹쓸 짓을 했다며 누명을 씌우기도 합니다.
『어룡전』에서의 계모 역시 악독합니다. 강씨는 재룡을 업은 포대기에 바늘을 끼워 넣고는 월에게 재룡을 보게 합니다. 그러고는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건 모두 월의 나쁜 행실 때문이라며 그를 모함하지요. 이런 방법이 별로 효과가 없자, 이번엔 좀 더 극단적으로 나갑니다. 강씨는 쥐를 잡는 데 필요하다며 이웃집 할머니로부터 독약을 구해 온 뒤, 월이 만든 음식에 적당히(?) 넣고는 ‘자기가’ 먹습니다! 즉 계모는 스스로 피해를 입더라도, 또 자기 아들을 아프게 해서라도 월을 쫓아내려 했지요.
이때 강씨가 월 남매를 쫓아내고는 이웃 사람과 하인들에게 당부하였다.
“그년이 어미를 음해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어 면목이 없기에 스스로 달아났다고 하여라.”
마침내 계모는 목적을 달성합니다. 조정의 부름을 받아 어의관이 집을 비운 사이, 강씨는 월을 모질게 매질하고 쫓아내지요. 누나를 잃은 용 역시 집 안에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린 오누이는 집을 나와 정처 없이 떠돌았어요.
이제 고난을 극복해야 주인공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이겠지요? 이들 앞에 놓인 과제는 가족(아버지)과의 재회, 가문의 회복이에요. 전자는 월이, 후자는 주인공 용이 그 역할을 해내지요.
너무나 힘들어 자결하려던 순간, 월은 윤 시랑 부부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고는 이 부부의 수양딸이 되어 곱게 자라지요. 한편 용은 통천도사를 만나 천문 지리와 병법을 배웁니다. 세월이 흘러 월은 혼인하고, 그의 남편은 장원 급제합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를 만나지요. 한편 나라에 흉노족이 침입하자 용은 전장으로 나가 적을 무찌르고 천자를 구합니다. 큰 공을 세워 승상에 오른 용 역시 공주와 결혼한 뒤 어(魚)씨 가문을 바로 세우고요.
마지막으로 강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건 판본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오누이를 쫓아낸 뒤 바로 죽었다고도 하고, 혹은 그 아들 재룡이 죽은 뒤 전처 자식들이 출세하는 모습을 보며 후회했다고도 해요. 특히 앞의 경우는 용이 이복동생 재룡을 데려다가 아끼고 보살피며 집안을 평안하고 화목하게 했다는 훈훈한 결말로 마무리되지요.
이 작품에서도 계모는 천인공노할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강씨는 왜 오누이를 모함하고 내쫓는 파렴치한 짓을 했을까요? 당시의 현실을 고려하며 강씨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조선은 유교적 가부장제가 근본인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중심이자 절대적 권력자는 아버지였어요. ‘가장(家長)’이라는 말에서 이런 사회 분위기가 드러나지요. 그런데 여기에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비록 첩이 아닌 정실부인이지만, 그녀의 지위는 무척 미묘합니다.
혹시나 남편의 마음이 죽은 전 부인에게 쏠려 자기를 가볍게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 아버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전처 아이들과의 서먹함, 어려서부터 맘 편하게 자란 친정과 달리 기댈 곳 없는 낯선 공간. 그녀는 여전히 ‘이방인’인 셈이지요. (실제로 기록을 보면 전처의 자식들이 계모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고, 모욕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경우도 많습니다. 소설과는 달리 계모가 따돌림당할 가능성이 컸지요.) 이런 상황에서 계모는 자식을 낳아야 합니다. 여성이 아닌 ‘어머니’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들을 낳아 가문의 혈통을 이어야 했어요.
강씨 역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어요. 당시는 장자 상속제였기에 장자인 어룡이 재산을 비롯한 가문의 모든 것을 차지하거든요. 남편이 죽으면 강씨와 그 아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집안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할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는 남편이 죽은 뒤, 시집올 때 가져온 자기 재산도 찾지 못한 채 친정으로 쫓겨난 계모가 많았습니다.) 계모의 위치가 불안정하니, 불안감은 계속되겠지요. 결국 강씨는 자기 아들에게 집안을 계승시키기 위해 그렇게 필사적(?)으로 오누이를 모함했습니다.
물론 강씨는 인륜을 저버린 짓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강씨 개인의 잘못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어요. 그 당시는 계모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나 비우호적이었으니까요. 한 인물의 행동을 비난하기에 앞서, ‘왜 그렇게까지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보는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문학 작품은 계모를 나쁜 사람으로 그릴까요? 그럴 만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지금은 SF부터 무협, 판타지, 공포, 로맨스, 추리 등 다양한 소설 장르가 존재하지요. 여기서 문제 하나 나갑니다. 옛사람들이 가장 좋아한 소설 장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래요. 바로 ‘가정 소설’과 ‘영웅·군담 소설’입니다. 누구나 생활의 중심이 가족이었기에 가정 소설은 대중성이 있었지요. 게다가 처첩 갈등, 계모와 전처 자식 간의 갈등 등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에 훨씬 더 와닿았습니다.
또한 가정 소설에서는 갈등을 일으킬 악인이 필요한데, 마침 ‘계모’가 그 역할을 담당하기가 좋았어요. 작품을 보다 자극적이고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극단적인 계모’와 ‘비극적인 아이들’의 대립 구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영웅 군담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고난을 겪은 주인공은 어렵게 도사를 만나 피나는 수련을 통해 도술을 익힙니다. 그런 뒤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하는 이야기는 웬만한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흥미진진했을 것입니다. 『어룡전』은 이 두 가지 구조를 합친 작품이랍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지금까지 알려진 이본(異本)만 48종입니다. 당시 인기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지요.
지금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새엄마’가 계십니다. 과거에 비해 이혼과 재혼이 자유롭기에 그 숫자는 앞으로 점점 많아질 거예요. 물론 이 가운데 몇몇은 뉴스에 나올 정도로 나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다수는 그렇지 않아요. 아이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따뜻하게 대하는 새엄마가 많습니다. 비록 내 배 속에서 품은 자식은 아닐지라도,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없을지라도, 이들은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우고 보살핍니다.
“우리는 모두가 편견을 비난하지만 누구나 편견에 물들어 있다.”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말입니다. 편견에서 벗어나긴 어렵다는 의미지요. 실제로 200년 전만 해도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고,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기에 여성이나 흑인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었어요. 어쩌면 계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행실이 확대·과장되어 ‘악인’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있진 않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안목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보다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예요.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읽고 또 생각하면서 이런 편견들을 극복해 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