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 선 그대에게 권합니다 -『용문전』
예전에〈TV 인생극장〉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이 코너의 주인공은 늘 선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A와 B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며 고민에 빠지지요. 그러다가 “그래, 결심했어!”라며 결국 한쪽 길을 선택합니다. 방송은 A와 B의 결과를 각각 보여 주며 시청자의 호기심을 채웁니다.
이 방송은 당시 꽤나 인기가 있었지요. 우리의 삶 역시 선택의 연속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뭘 먹을까?’부터 ‘어느 대학에 갈까?’, ‘그 사람과 결혼할까, 말까?’까지 수많은 선택지가 우리 앞에 놓여 있어요.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 방송처럼 선택에 따라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미리 엿볼 수도 없지요. 이에 삶의 고비에서 내린 결정은 이후 삶을 결정짓는 ‘인생 교차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인생 교차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요? 무엇을 근거로, 어떤 생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할까요? 오늘 『용문전』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용문전』은 작자·연대 미상 작품으로, 배경은 명(明)나라와 호(胡)나라입니다. 호나라에 사는 용훈 부부는 늦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인은 청룡이 달려오는 태몽을 꾸고 아들 ‘용문’을 낳지요.
청년으로 성장한 용문은 어느 날 물고기를 팔러 성안으로 갔다가 비를 피하려고 정자로 들어갑니다. 무척 피곤했던 탓일까요? 깜빡 졸았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는 꿈을 꿉니다. 자신이 북두칠성의 기운을 타고났으며, 훗날 두 여인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된다고요.
한편 명나라의 ‘연화도인’은 하늘의 기운을 살피다가 호나라에서 영웅이 탄생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물이 장차 천하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을 알고 찾아가지요. 이렇게 용문과 연화도인은 만납니다.
용문이 영웅임을 한눈에 알아본 연화도인은 그의 집으로 가서, 용문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부모에게 청해요. 부모는 이를 허락하고, 이제 그는 연화도인을 스승으로 모십니다. 스승을 따라 연화산으로 간 용문은 8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웁니다. 최고의 스승을 만나 천문 지리와 병법, 술법 등 모든 것을 익히지요. 그리고 스승은 용문에게 하산을 명합니다.
본래 스승이 용문을 가르친 목적은 명나라를 구하는 데 있었습니다. 용문이 호나라를 도우면 명나라가 위태로울 것을 염려하여, 그를 제자로 삼은 것이지요.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요? 호나라와 명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용문은 아무런 고민 없이 호나라 편에서 싸우고자 합니다. 호나라가 자기가 태어난 나라인 데다, 스승으로부터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으니까요. 거기에다가 호나라의 왕은 직접 용문을 찾아와 함께할 것을 청하기까지 합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기 위해 삼고초려한 것처럼 말이지요. 용문은 왕이 직접 자신을 찾은 것에 감격하고, 자기 기량을 펼칠 기회로 생각해 기꺼이 호나라 왕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호왕의 편에서 전쟁을 겪으며 용문은 ‘아,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호왕은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며 명나라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용렬(사람이 변변하지 못하고 졸렬하다)한 데다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기 일쑤였지요. 게다가 이 무의미한 전쟁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목숨을 잃는 그들을 보며 용문은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어요. 이때 그의 마음을 극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발생합니다. 스승 연화도인으로부터 온 편지였지요. 잠시 볼까요?
호나라의 왕이 비록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나 세상의 모든 사람만 해칠 뿐이로다. …(중략)… 사제지간의 인연을 생각하여 어두운 데를 버리고 밝은 데로 돌아와 명나라 사직을 위하여라. 그대 일생을 경계함이니 늙은 스승의 말을 헛되이 들어 먼 훗날 뉘우침이 없게 하라.
편지를 읽은 용문은 갈등합니다. ‘군주에 대한 충성이냐, 아니면 스승의 말을 따를 것이냐’의 기로에 섰으니까요. 고민하던 그는 결국 명나라군에 투항합니다. 그러고는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겠다고 하지요. 자신이 섬기던 임금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분노한 호왕은 용문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아들에게 편지를 쓰도록 합니다. 아비의 목숨이 위험하고, 임금을 배신하는 건 신하로서 할 짓이 못 된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편지 쓰기를 끝내 거부하고, 위조 편지를 보내려던 호나라의 계략은 금세 간파당합니다. 이제 스승의 설득으로 용문은 명군으로 완전히 돌아섭니다. 그리고 호나라를 공격하는 데 앞장서 호왕을 죽이고 전쟁을 끝내지요.
이후 용문은 명나라로부터 높은 벼슬을 받고, 꿈에 나타난 두 여인(승상의 딸과 그의 아리따운 시비)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뜨는 것으로 작품은 끝나요.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이 작품은 기존의 영웅 소설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주인공의 ‘변절’입니다. 기존의 영웅 소설에서 주인공이 임금을 배신하고 적에게 투항한 경우는 없습니다.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는 말처럼 충성된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으니까요.
실제로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수많은 고려 신하는 조정에 참여하길 거부했습니다. 또 단종을 유폐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조선의 여러 신하는 협력을 거부했지요. 사육신이나 생육신이란 말이 있듯이요.
이들에게 지조는 목숨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섬기던 임금을 버리고, 나중에는 자기 임금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요? 우리는 용문이 내적 갈등을 겪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문이 깊이 고민하고 있을 때 스승의 편지를 가져온 이가 말합니다.
천시(天時)는 멀었고 인심(人心)은 귀순하니 어찌 이를 거역하려 드시오. 자고로 현명한 신하는 군주를 가려서 섬기고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트는 법이오. 그대는 잘 생각하시오.
‘천시’란 말 그대로 하늘의 때입니다. 하늘의 때가 멀었다는 건 결국 명나라는 아직 건재하며, 호나라가 명나라를 침략하는 건 하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지요. ‘인심이 귀순한다’는 말은 ‘사람들의 마음이 순리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이 전쟁은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며, 도리어 고통만을 안겨 줄 뿐이었어요. 그렇기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야말로 이치에 맞는다는 것입니다.
용문은 본래 영웅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했지요? 그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 즉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알지 못한 거예요. 호왕의 정벌은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용문이 충(忠)에 집착하여 자신의 능력을 저버린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분명 백성을 위하라는 하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심사숙고하던 용문은 결국 호나라를 저버리고 신속히 전쟁을 끝냅니다.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왔음을 깨달은 것이죠.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신념’이었지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용문이 지닌 진짜 영웅적 자질이 아닐까 싶네요.
또 하나 흥미로운 요소는 이 작품에 주인공의 적대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래 영웅 소설에는 끝판왕이 나와야 재미있잖아요? 가급적이면 센 놈으로요. 기존 영웅 소설에는 주인공의 라이벌이 꼭 등장합니다. 이들은 주인공과 대결하면서 갈등을 조성하고 시련을 부여하며, 주인공이 더 큰 성공을 이루게끔 만드는 역할을 하지요.
그런데 『용문전』에는 주인공의 라이벌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대결 구도를 통한 외적 갈등을 드러내기보다, 상황에 따른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어요. 용문의 최초 결정(호나라 편에서 참전한 것)이 이후의 갈등 요소로 작용하게 된 것이랍니다.
물론 개인 간의 대립은 있습니다. 바로 용문과 그의 아버지 용훈의 갈등이지요. 아들이 명나라에 투항한 뒤 호왕을 죽였다는 사실을 안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높은 벼슬에 오른 아들이 집으로 초청해도 응하지 않고, 아들의 결혼식에도 마지못해 참석하지요. 그리고 결혼식이 끝난 뒤에는 자연에 은거하며 아들과 만나길 끝끝내 거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동을 ‘반역’이라 여겼어요. 그랬기에 둘은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부자간의 갈등은 기존의 가족이 분리되고, 새로운 가정(용문과 두 아내)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즉 과거의 질서[忠]와 헤어지고 새로운 질서[天命]를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일확천금을 얻으려고 수많은 투자자를 속인 주식 사기꾼, 기업 경영의 편의를 위해 권력자에게 뇌물을 준 CEO, 국민의 믿음을 저버리고 사익을 추구한 정치인, 징역 7년을 확정받은 전 국정원장…. 우리 주위에는 인생 교차점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 이가 많습니다. 그들은 지금 그 선택의 결과를 추궁받고 있지요.
『용문전』의 주인공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선택의 상황에서 가치 충돌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요. 그래서 선택의 기준은 ‘올바른 길’을 찾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은 진정 올바른 길인가?’에 대해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