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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함,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핵심

사회를 보다 정의롭게만들어가려는 그대에게 권합니다 -「황새결송」

by 박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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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公正), 공평하고 올바름을 뜻하다


제가 중학생 때였습니다. 그 당시 밤마다 수많은 사람을 TV 앞에 모이게 한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바로 〈판관 포청천〉이지요. 포청천은 실존 인물로, 송(宋)나라 때의 재판관이에요. 그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 ‘청관(淸官)’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철면무사’(사사로운 정에 구애되지 않음)는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었지요.

대만에서 제작된 드라마가 우리나라 공중파에서 방영되고, 나아가 엄청난 인기를 끈 것은 무척 이례적이었어요.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통해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어요. 황제의 사촌, 개국 공신의 자손이라도 법 앞에서 평등했으며, 누구도 엄정한 정의의 칼날을 피해 갈 수는 없었지요.

재판은 공정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공정(公正)’이란 ‘공평하고 올바름’을 뜻해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상황에서는 정의로운 재판 결과가 나오긴 어렵습니다. 이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현실은 어떨까요? 이번 작품을 통해 함께 생각해 봅시다.



받은 게 있는데 어찌 네 일을 무성의하게 하겠느냐?


「황새결송」은 송사 소설입니다. 황새가 결송(決訟), 즉 ‘소송 사건을 판결해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경상도에 큰 부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일 년 동안 곡식 추수량이 만석이 넘을 정도로 큰 땅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루는 부자에게 일가친척이 찾아와서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처음 몇 번은 도와주었지만, 친척의 요구 사항은 점점 더 많아졌지요. 심지어 같은 조상의 자손인데 어찌 혼자서만 잘 먹고 잘사느냐면서 ‘재산의 반’을 나눠 달라고 요구했어요.

아무리 친척이라 해도 이런 무리한 요구는 상식에 어긋납니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어요. 막무가내인 친척이 온갖 욕설을 해 대며 집에 불까지 지르려고 했거든요. 그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괘씸한 마음이 들어 부자에게 권했습니다. 그를 관아에 고소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라고요. 이 말을 들은 부자는 친척의 버릇도 고칠 겸 서울에 있는 형조를 찾아가 고소했지요.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부자는 고지식해서 재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어요. 본래 재판이란 각자의 사정을 듣고 공정히 판결해야 합니다. 부자 역시 자신의 송사가 잘 처리될 것이라 믿고 판결을 마냥 기다렸지요.


반면에 친척은 건달 같아도 세상 물정에 익숙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자기에게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갈지 알았지요. 그는 재판관부터 서리, 사령을 찾아 친분을 쌓으며 이번 일을 잘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며칠 뒤 재판 결과가 나왔습니다. 친척이 원하는 대로 재산을 전부 나눠 주라는,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판결이었지요. 당시에는 이런 판결에 항소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었습니다. 대 놓고 따지다가는 오히려 관정발악했다고(심문받는 사람이 관원에게 반항했다고) 감옥에 갇힐 수도 있으니까요. 부자는 답답하고 분할 따름이었어요. 그래도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관원들에게 옛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짐짓 호기심이 든 관원들이 해 보라고 하자, 부자가 이야기를 꺼내지요.


옛날에 꾀꼬리와 뻐꾸기, 따오기가 살았습니다. 이들은 누구의 울음소리가 가장 좋은 지 서로 다투었지요. 그러나 결론이 나지 않자 송사를 통해 결정하기로 합니다. ‘꾀꼴꾀꼴’ 우는 꾀꼬리와 ‘뻐꾹뻐꾹’ 하는 뻐꾸기의 소리는 참 듣기 좋습니다. 하지만 ‘따옥따옥’ 하는 따오기의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진 않지요. 따오기는 걱정입니다.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질지는 뻔하니까요.

하지만 패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따오기는 판결을 맡은 황새에게 청탁하기로 해요. 그때부터 따오기는 무척 바빠집니다. 시냇가와 웅덩이를 돌면서 개구리, 우렁이, 두꺼비 등을 잔뜩 잡아 오지요. 그리고 으슥한 밤에 황새를 찾아가서 사정을 말하고는 잘 좀 부탁한다며 선물(?)을 건넵니다. 그러자 기분 좋아진 황새가 말해요.

“송사는 본디 꾸며 대기에 있으니 이른바 이현령비현령(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라. 어찌 네 일을 무성의하게 하겠느냐. 전에도 너는 내 덕을 많이 입었거니와 이 일도 내 아무쪼록 힘을 써 보겠노라.”

다음 날 셋은 황새 앞에서 노래자랑을 벌입니다. 꾀꼬리의 노랫소리는 꽃 피는 봄날에 흩날리는 버들잎처럼 참으로 아름다웠지요. 황새가 들어도 너무나 좋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좋다고 하면 받은 뇌물은 어쩌나요? 잠시 생각하고는 판결을 내립니다.

“네 들어라. 당나라 시에 ‘꾀꼬리를 날려 보내고 가지 위에서 울게 하지 마라.’ 하였으니 네 소리 비록 아름다우나 애잔하여 쓸데없도다.”

이번에는 뻐꾸기가 나와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 소리는 소나무 숲을 스쳐 가는 바람처럼 시원합니다. 그러나 황새는 말하지요.

“네 소리 비록 시원하고 깨끗하나 궁상맞은 데가 있으니 가히 불쌍하도다.”

마지막으로 따오기 차례입니다. 남 앞에 서기도 부끄럽고 민망한 목소리지만, 고개를 낮추고는 소리를 꽥꽥 질러 대지요. 황새가 그 소리를 듣고는 무릎을 탕탕 치며 말합니다.

“쾌재며 장재로다. 마치 장판교 다리 위에 백만 대군 물리치던 장비의 호통이로다. 네 소리 가장 웅장하니 짐짓 대장부의 기상이로다.”

이렇게 해서 따오기가 일등을 차지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부자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그런 짐승이라도 뇌물을 먹고 잘못 판결하여 꾀꼬리와 뻐꾸기에게 못할 노릇을 하였으니 어찌 재앙이 자손에게 미치지 않겠습니까? 이제 서울 법관도 이와 같아 소인의 일은 벌써 판결이 났으매 부질없이 말하여 쓸데없으니 이제 물러나겠습니다.”

이에 형조 관원들은 대답할 말이 없어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렇게 작품은 끝나고 말지요.



공정함은 그 사회의 건강함과 비례한다


송사 소설에서는 대부분 억울한 피해자가 승소합니다. 하지만 「황새결송」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재판관이 친척의 손을 들어 주지요.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이와 비슷한 일이 많았습니다. 남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고, 뇌물을 공공연하게 건넸으며, 돈과 권력이 결탁한 결과 불합리한 판결이 나왔지요. 특히나 부농(富農)·부상(富商)은 쉽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신분이 낮으니 수탈의 대상이 된 건 당연했어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뇌물을 준 패역무도한 친척이 송사에서 이긴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풍자의 대상은 형조 관원입니다. 황새로 비유되는 이들은 뇌물을 받고 권력을 남용해 그릇된 판결을 내렸지요. 부자의 이야기를 들은 형조 관원들은 부끄러워하지만, 그렇다고 판결을 뒤집진 않습니다. 이들에겐 잘못을 시인할 용기조차 없었지요.


지금은 어떨까요? 법조계에 ‘전관예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재임 때와 같은 예우를 베푸는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관예우 변호사는 일반 변호사보다 수임료가 훨씬 비쌉니다. 30년간 판검사로 근무하며 받은 급여보다 변호사를 개업한 뒤 3년간 벌어들인 돈이 더 많다는 말도 있지요.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1년간 번 돈이 무려 60억이 넘는다는 청와대 전 민정수석에 대한 뉴스 기사도 있으니까요.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기사가 신문에 종종 실리는 걸 보면 현실이 어느 정도 그렇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변호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서 몸값이 비쌀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전관예우’라는 말처럼 전직 관리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판결이 내려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값비싼 변호사를 고용할 수 없는 사람은 불합리한 판결을 감수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는 분명 공정하지 못한 일입니다.

작품 속 부자는 부당한 판결을 옛이야기로 풍자할 뿐, 그 이상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는 불합리한 판결의 시정을 요구하고, 다시금 재판을 요청할 수 있어요. 물론 누구나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겠지요.


‘공정성’이 사라지는 건 우유의 유통 기한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우유를 마시지 않아요. 그 사회의 건강함은 공정성과 비례합니다. 여러분도 이 점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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