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 아래에서

2장. 정원이 숨 쉬는 방식

by Bi jou

"고하, 멈춰."


소영이의 음성에 날이 서 있었다. 단 한 음절 차이로 함정을 피해 갈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들 앞엔 비정상적으로 조용한 폐허가 있었다. 콘크리트가 깎여나간 넓은 공터. 빌딩의 절반은 녹아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꽃이었다. 너무 예쁜 꽃이었다. 마치 누군가 애써 손질한 조경처럼. 죽은 도시의 한복판에 피어난, 의도된 평화.


"에라의 정원... 이네." 고하가 나직하게 말했다.

소영은 가방에서 낡은 쪽지를 꺼냈다. 반쯤 찢긴 종이엔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에라의 정원은 시간을 접는다. 들어갈 땐 걷지만 나올 땐 기어야 한다. 머릿속은 남고 몸은 무너진다.'

그녀는 조심스레 허리를 낮추고 정원 경계선을 살폈다. 꽃잎 하나가 피었다 닫히는 사이,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뭔가를 삼켰다가 뱉는 듯한 기이한 호흡. 고하는 넋을 놓고 꽃을 바라봤다.


"이런 걸 봐도 너는 아무 느낌이 없어..?"


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감정 드러내지 마. 여긴 '감상'을 기억하는 놈들도 있어. 자칫 잘못 접촉하면... 네 기쁨이나 슬픔, 다 빨아 먹힌다."

그때였다. 그들 뒤편 바닥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린 소영은 싸늘하게 말했다.

"... 따라왔네."

콘크리트 틈새에서 크래브의 손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뿌리처럼 생긴 덩굴들, 각 끝에는 물고기 눈처럼 투명한 막이 있었다. 손처럼 생긴 그것은 땅을 더듬으며 신경 파장을 추적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소영이가 말했다.

"이건 생각을 훔친다. 네 뇌파를 읽고 거짓 기억을 보여줄 거야."

그러나 이미 늦었다.

고하의 시선은 흐려져 있었다. 그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 엄마? 아냐, 지금 여긴 아니야. 나... 아니 난 너한테 그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었어."

소영은 씹어 문 담배 필터를 꺼내 물고, 허리춤에 달린 전기 충격기를 빼들었다. 고하의 옆구리를 그대로 찔렀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현실로 돌아왔다.


"으악!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넌 네 뇌가 적이라는 걸 잊지 마."

소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꼬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방금, 잠깐.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정원을 빠져나온 그들은 또 다른 함정에 들어섰다.

길가에 피어난 가면들꽃 수십 송이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꽃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 웃고 있는, 죽은 사람의 얼굴.

고하는 걸음을 멈췄다.

그중 하나가... 소영이의 얼굴이었다.


"저건... 뭐지?"

소영은 다가가려다, 발끝을 멈췄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뒤를 돌아 고하를 노려봤다.

"지금 무슨 감정이 드는지, 네가 대답해 봐."

고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나는... 슬퍼. 근데, 너도 살아 있는데 왜... 너랑 같은 얼굴이 저기 있지?"

"그래서 넌 위험한 거야." 소영은 차갑게 말했다.

"저건 '내 얼굴'이 아니야. 누군가의 기억 속 내 얼굴이지."

그녀는 숨을 들이쉬고, 몸을 낮췄다.

"저 꽃은 기억을 흡수해 모방해. 누군가, 이 근처에서 나를 생각하며 죽은 거야."

그 말에 고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그럼, 널 원망하며 죽은 사람도 있었단 거야?"

소영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응. 꽤 여러 명이."




밤은 빨리 찾아왔다. 아니, 이곳에선 그저 어둠이 '밀려온다'는 표현이 맞았다.

소영은 방공호복의 손목을 열어 녹음기를 켰다.

지지직거리는 기계음 속에서, 익숙한 음성이 흘렀다.

"... 너 또 들었구나. 아직도 그걸..."

고하는 고개를 돌렸다.

"그걸 들을수록 네가 사라지는 것 같아."

소영은 말없이 장비를 껐다.

"나는 아직 남아 있어. 다만, 내가 날 기억하지 못할 뿐이야."


뒤척이는 소리에 소영은 등 뒤에 누워있을 고하를 생각했다. 그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질문을 떠올렸다.

'왜 나를 따라오지?'

그녀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잠을 설치는 고하를 향해 혼잣말처럼 말했다.

"내일은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해. 그 목소리가 날 부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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