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에는 왜 폐지 줍는 노인이 없을까

부고니아

by 요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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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을 제외하면 24년 동안 인천에서 살았다. 학창 시절은 부평에서 보냈고, 지금은 송도에 산다. 송도로 이사 온 지 6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상하게도 이 동네에는 정이 쌓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파마를 하러 굳이 갈산동 미용실을 찾는 어머니를 따라 오랜만에 옛 동네를 찾을 때면 묘한 향수에 젖곤 한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습관처럼 동네를 걷는다. 제2의 집 같았던 도서관, 옛 아파트, 그 뒤의 작은 공원까지. 인적 드문 산책로에서 그 시절 듣던 음악을 들으며 변한 풍경과 변하지 않은 풍경 사이 '틀린 그림 찾기'를 한다. 그러다 보면 영원한 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하루는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 문득 옛 동네와 지금 동네의 결정적인 차이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폐지 줍는 노인'의 존재다. 어릴 적 부평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송도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폐지를 주워 생계를 잇는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마음이 괜스레 적적해졌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시스템은 복잡해진다. 개인의 부족함 때문이든 사회의 불공평 때문이든, 복잡한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밖으로 밀려난다. 영화 <부고니아>의 주인공 역시 시스템 밖으로 축출된 개인이다. 그는 무력감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에게 '지구를 구할 영웅'이라는 서사를 부여한다. 고립된 방에서 입맛에 맞는 정보만 편식하다 보니, 객관적 진실은 사라지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 편향'이 그를 지배한다.


그는 맹신을 행동으로 옮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을 고문하는 부조리한 폭력이 발생한다. 그의 폭력은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성실하다. 제3자의 눈에는 끔찍한 범죄지만, 그의 세계에서는 숭고한 구원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구를 너무 사랑해서 인간을 파괴한다. 이 지독한 아이러니야말로 란티모스 감독이 포착한 인간성의 가장 서늘한 바닥이다.


영화 속 CEO는 주인공에게 말이 통하지 않는 '외계인'이다. 여기서 문득 송도에서 보지 못했던 폐지 줍는 분들이 떠올랐다. 화려한 마천루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구도심 골목을 누비며 하루를 버티는 이들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난과 소외는 마치 다른 행성의 이야기처럼 낯설고 먼 이야기일 테니까.


영화는 이 서글픈 은유를 충격적인 사실로 치환하며 비극의 정점을 찍는다. 그녀는 비유가 아니라, '진짜' 외계인이었다. 주인공의 망상인 줄만 알았던 음모론은 사실이었고, 그들은 애초에 종부터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반전이 주인공에게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닿을 수 없는 두 세계의 절망적인 거리감만 확인시켜 줄 뿐이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가 진실을 외쳤으나 세상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했고,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존재는 인간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에 모두가 파국을 맞이했다.


우리가 사는 현실도 다르지 않다. 고층 빌딩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권력자들의 논리는 종종 지상의 우리에게 외계어처럼 들린다. 반대로 그들에게 우리의 절규는 소음이나 개미들의 아우성으로 치부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한 단절 속에서 누군가는 괴물이 되고, 누군가는 그 괴물에게 잡아먹힌다.


제목 '부고니아(Bugonia)'는 죽은 소의 사체에서 꿀벌이 태어난다는 고대의 믿음을 뜻한다. 주인공은 CEO라는 제물을 바쳐 지구의 평화라는 꿀벌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처절한 몸부림 끝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과연 죽음에서 생명이 태어났는가, 아니면 썩어가는 악취만 진동하는가.


다시 낡은 도서관 앞을 서성이다 송도로 돌아오는 길, 매끈하게 닦인 도로 위에는 여전히 폐지 줍는 분들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영화 <부고니아>는 그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난 이들의 광기가, 실은 우리 사회가 외면한 진실의 일면일지도 모른다고 서늘하게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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