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글을 쓴다는 것 - 권수호
처음 블로그에 글이라는 것을 썼던 날을 기억한다. 대략 4년 전, 집 근처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손님이 끊긴 매장 안에는 냉장고가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나는 카운터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편의점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릿속은 소설 내용보다 더 복잡한 잡음들로 가득했다. 아마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이었으리라. 정확히 어떤 말다툼이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4년이 지난 지금 흐릿한 안개처럼 희미하다. 다만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명치끝에 걸리는 묵직한 돌덩이 같은 불편함, 그 감정의 질감만은 선명하다.
도망치고 싶었거나, 혹은 잊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스마트폰 메모장을 켰다. 그곳에 두서없이 마음을 쏟아냈다. 논리도, 기승전결도 없었다. 그저 내 안의 소음을 텍스트로 옮겨 적었을 뿐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활자로 박제된 나의 불안을 마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 꽉 막혀 있던 배관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첫 번째 ‘쓰는 삶’의 효능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읽고 나면 습관처럼 감상문을 쓴다. 글쓰기는 내 일상의 불안을 치료하는 상비약이 되었다.
나는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지금도 카티아로 기계를 설계하고, 오토캐드로 도면을 뽑는 과정을 반복한다. 솔직히 내 적성에 딱 들어맞지도 않고, 부족한 머리로 이 작업들을 해내기가 벅찰 때도 많다. 하지만 이 일에도 장점은 있다. 바로 Input과 Output의 결과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 특히 내가 도전했던 ‘웹소설’의 세계는 달랐다. 최근 나는 야심 차게 웹소설 연재를 시작했다. 초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조회수가 오르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 공식을 찾았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네이버 웹소설 랭킹 집계에서 제외된 것이다.
원인은 나의 ‘취향’ 때문이었다. 글의 분위기를 살리려 힙합이나 인디 밴드 음악을 추천곡으로 넣었고, 인물의 감정을 날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욕설을 섞기도 했다. 설계로 치면 꼭 필요한 구속이라 여겼던 것들이, 플랫폼 시스템에서는 ‘중복 구속’으로 판명된 셈이다. 결국 연재는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은 조회수로 마무리되었다.
“Easy come, easy go.” 힙합 가사에나 나올 법한 이 말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도면을 그리듯 ‘효율적인 성공’만을 설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새로 연재 중인 소설 역시 반응이 미미하다. 독자들은 분량이 쌓이지 않은 글을 잘 읽지 않고, 플랫폼은 15화부터 제대로 밀어준다는 걸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고작 5화를 올려놓고 오르지 않는 조회수에 실망하는 나를 본다. 좋은 성과란 본디 천천히 오는 것임을 알면서도, 공학도의 머리와 작가 지망생의 가슴 사이에서 나는 매일같이 오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조급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을 때, 사두고 읽지 않았던 책들 중 한 권인 권수호 작가의 『마흔에 글을 쓴다는 것』을 집어 들었다. 페이지수도 적고, 글도 쉽게 읽힐 거 같기 때문이었다. 15년 차 직장인이자 작가인 그는 마흔의 길목에서 느끼는 불안을 ‘쓰는 행위’로 다스린다고 했다. 책장을 넘기다, 나는 마치 감전된 듯한 문장에서 멈춰 섰다.
“행복을 찾으려면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어둠을 밝음으로 바꾸는 연습을 반복한다면 결국 시커먼 어둠도 밝음 속에 있는 어둠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 모두 어둠을 품은 밝음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나는 그동안 내 안의 ‘어둠’을 부정하려고만 했다. 편의점에서의 암울했던 미래, 아버지와의 불화, 취업 준비생이라는 불안정한 신분, 반응 없는 연재란의 적막함. 이 모든 것을 빨리 삭제하고, ‘성공한 작가’ 혹은 ‘번듯한 엔지니어’라는 ‘밝음’으로 점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어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밝음으로 바꾸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연습에는 반드시 ‘시간과 노력’이라는 투입값이 필요하다고. 설계 도면의 오차를 잡기 위해 밤새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왜 내 인생의 행복을 찾는 시간은 단축하려고만 했을까. 지금 내가 겪는 이 답답함은 실패가 아니라, 내 인생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스케치’ 단계임을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낮에는 치수를 계산하고 딱딱한 물성을 다루는 설계를 공부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정답이 없는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와 글을 쓴다. 때로는 이 두 가지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너무나 다르듯, 앞으로 맞이할 1년 뒤의 나도 예측할 수 없다. 어쩌면 나는 나이와 지혜가 꽉 찬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안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불안이 두렵지만은 않다. 나에게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고, 묵묵히 응원해 주는 가족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쓰기’와 ‘독서’라는 든든한 설계 도구가 있다.
내가 쓴 소설에 반응이 없어도 괜찮다. (사실 안 괜찮다.) 내 인생은 단편 소설이 아니라 장편 대하소설이니까. 나는 오늘도 새로고침(F5) 키를 누르는 대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다. 결과를 확인하는 대신, 진심이라는 과정을 입력하기 위해서다.
마흔이 되었을 때, 나도 저자처럼 나의 어둠을 담담하게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지금 내가 쓰는 이 투박한 문장들이, 훗날 나를 지탱해 줄 단단한 뼈대가 되어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