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시대에 갇힌 고전 그리고 잃어버린 여백에 대하여

폭풍의 언덕

by 요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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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의 일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주술회전> 극장판 상영 직전, 어두워진 극장 안으로 짤막한 예고편 하나가 흘러나왔다. 에밀리 브론테의 불멸의 고전, 『폭풍의 언덕』이 새로운 영화로 탄생한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묘한 기대감과 동시에 짙은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그 방대하고도 처절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인간의 밑바닥을 긁어내는 그 치밀한 묘사들을 고작 2시간 남짓한 영상 매체 안에 어떻게 담아낸다는 말인가. 하지만 호기심이 의구심을 이겼고, 나는 이 영화가 개봉하면 반드시 스크린으로 확인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를 보러 자주 가던 극장을 찾은 날, 시작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온갖 화려한 광고 영상과 귀를 때리는 사운드로 왁자지껄해야 할 상영관 안이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이른 아침, 무거운 피곤을 어깨에 얹고 어디론가 실려 가는 출근길 지하철 안처럼, 사람들의 낮고 조심스러운 웅성거림만이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본래 상영 전 광고가 이어지는 15분은 관객들이 팝콘을 먹으며 긴장을 푸는 시간이다. 하지만 스크린은 묵묵부답이었고, 그 애매하고 숨 막히는 침묵은 무려 15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영화관을 드나들었지만,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낯선 풍경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공간에 있던 우리 모두의 태도였다. 이 상황이 명백히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상영관 안의 모든 사람이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 누구도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묻거나 항의하러 가지 않았다. 침묵의 카르텔에 갇힌 것 같은 기묘한 시간. 결국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매사를 둥글게 넘기곤 하는, 낙관적이고 느긋한 성격의 내가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을 찾아가 이 당황스러운 정적에 대해 알렸고, 돌아온 것은 다소 냉담하고 기계적인 반응이었지만, 다행히도 본 영화가 시작될 무렵에는 사운드가 정상적으로 흘러나왔다. 어쩌면 그 기묘했던 극장의 침묵은, 앞으로 스크린 위에서 펼쳐질 당혹스러운 전개에 대한 모종의 복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기 전, 의식적으로 사전 정보나 다른 이들의 평론을 찾아보지 않았다. 백지상태에서 작품이 주는 고유한 질감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크린에 펼쳐진 세계는 내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폭풍의 언덕』의 결과는 너무도, 그리고 철저하게 달랐다.


물론 원작 특유의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려 애쓴 흔적은 보였다. 하지만 연출의 방향성은 묵직한 심리극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도발적이고 감각에 의존하는 스타일리시한 뮤직비디오에 가까웠다. 솔직히 말해, 나는 깊이 실망했다. 내가 브론테의 소설을 그토록 아끼고 좋아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황량하고 거친 요크셔의 자연,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드는 숨 막히는 계급 갈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땔감 삼아 타오르는 히스클리프의 처절하고도 끈적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인물들의 뒤틀린 내면이 활자를 타고 서서히 전이되는 그 서늘한 경험이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라 믿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내가 사랑했던 그 밀도 높은 감정선들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렸다. 감독은 원작의 깊은 우물 대신, 그 표면을 덮는 화려한 도파민과 자극적인 스타일만을 얄팍하게 깔아 놓았다. 서사가 쌓아 올려야 할 감정의 설득력은 감각적인 비주얼과 파격적인 연출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다.



이 걷잡을 수 없는 얕은 자극의 향연을 지켜보며, 나는 이것이 어쩌면 감독이 의도한 바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에 도달했다. 부인할 수 없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도파민이 모든 가치의 우위에 서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그렇다. 나 역시 즉각적이고 강렬한 쾌락을 주입하는 이 현대의 도파민 시스템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무심코 열어본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자극적이거나 성적인 알고리즘이 화면을 스치면, 뇌는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손가락은 홀린 듯 화면을 쓸어 넘긴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의미 없는 이미지의 홍수 속을 부유한다. 그 영상을 소비하는 찰나의 순간에는 쾌락을 느끼고 즐겁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휴대폰 화면이 꺼진 후 나에게 남는 것은 지독한 공허함뿐이다. 그 파편화된 시간들은 나에게 어떠한 경험의 확장도, 깊이 있는 사유의 단초도 던져주지 못한다.


스크린 속에서 끝없이 서로를 할퀴고 탐닉하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모습을 보며 나는 현대인의 그 텅 빈 도파민 중독을 겹쳐 보았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두 사람의 관계는 영혼의 교감이라기보다는, 찰나의 자극을 좇아 서로를 파괴하는 맹목적인 중독에 가까워 보였다. 끝없이 유해한 관계를 질주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은 끝에 결국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듯, 자극만을 좇는 이 영화의 화려한 껍데기 안에는 깊이를 음미할 어떠한 여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수많은 매체 중에서도 특히 '책'을 사랑하는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두뇌 회전이나 정보 처리 속도가 남들보다 퍽 빠르거나 기민한 편이 아니다. 독서는 이런 나에게 완벽한 통제권을 쥐여준다. 책을 읽을 때 독자는 스스로 시간의 주인이 되어 이야기의 흐름과 속도를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다. 숨 막히게 몰아치는 사건 앞에서는 활자 위를 빠르게 내달릴 수 있고,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문장 앞에서는 언제든 책장을 덮고 가만히 천장을 응시하며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한마디로 독서는 '내 템포'에 맞춘 주체적인 호흡이다.


반면 영화라는 매체는 그 친절한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극장의 불이 꺼지는 순간, 관객은 오로지 창작자가 설정해 놓은 일방적인 템포에 속절없이 몸을 맡겨야 한다.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없는 그 시공간 속에서, 영화는 시각적 보여짐과 관객의 생각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압도적인 이미지가 먼저 망막을 강타하고 지나간 후에야, 뒤늦게 헐떡이며 생각이 그 뒤를 쫓아가는 구조다.


문제는 이 새로운 <폭풍의 언덕>이 나의 생각과 사유가 뒤따라갈 최소한의 틈조차 내어주지 않을 만큼, 시청각적 자극의 강도가 폭력적일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다. 19세기 요크셔의 황야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영화 전반을 채우는 사운드는 이질적일 만큼 힙하고 지극히 요즘의 트렌드를 따르고 있다. 게다가 장면 하나하나는 15세 관람가라는 등급 판정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수위가 높고 파격적이며, 심지어 BDSM을 연상시키는 요소들마저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화려한 포장지 속에서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이 시각적 굉음 속에서, 영화가 담고 있는 원작의 본질이나 내용의 깊이를 차분하게 반추해 보는 것은 나 같은 '영화 하수'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결국 내가 이 영화에서 목격한 것은 브론테가 창조해 낸 불멸의 사랑과 복수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전의 탈을 쓴 채, 현대인들의 도파민을 쥐어짜 내기 위해 정교하게 조립된 120분짜리 숏폼 영상의 확장판에 불과했다. 극장을 나서는 길, 사운드 문제로 적막이 흘렀던 영화 상영 전의 그 15분이 차라리 가장 평화롭고 사유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는 역설적인 생각이 들었다. 스타일은 남았으나 서사는 길을 잃었고, 자극은 폭발했으나 여운은 휘발되었다. 내가 사랑했던 『폭풍의 언덕』의 거친 바람 소리는, 힙한 비트와 도발적인 미장센에 완전히 먹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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