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시간 속, 얼빠진 사랑에 대하여

윤슬의 바다 - 백은별

by 요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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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여자친구는 많은 커플이 그러하듯 항상 같이 있는 시간이 짧다고 생각한다. 일주일에 두 번 보면 많이 보는 거고, 정말 바쁠 때는 일주일에 한 번도 보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헤어짐이 아쉬울 때면 농담 삼아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며 시간을 멈추는 척을 하곤 한다. 물론 손가락을 튕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창밖의 자동차는 여전히 달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대화하며, 바람의 흐름도 기압에 따라 무심히 이동할 뿐이다.



그런 여자친구로부터 최근 편지와 함께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편지의 말미에는 "우리가 자주 나누곤 했던, 시간을 멈추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야"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 문장 덕분에 책의 내용이 얼추 예상은 갔지만, 막상 그 안에서 마주한 활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백은별 작가의 『윤슬의 바다』는 초능력자가 억압받고 차별받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윤슬은 내가 여자친구와 장난스레 흉내 내던 바로 그 능력,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소녀다. 그리고 바다는 이 초능력자를 고문하고 탄압하는 부모를 둔 소년이다. 가해자의 세계에 속한 소년과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소녀. 이 둘의 로맨스에는 흔한 코미디나 달콤함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오로지 처절하고 서글프기만 하다.



이 가혹한 현실 속에서 두 사람은 기꺼이 서로를 향해 뛰어들며 얼빵한 사랑을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수많은 행동들은 본래 제3자가 보기엔 멍청해 보이고, 이해하기 힘들며, 명확한 논리로 설명하기는 더욱 힘들다. 일상적인 로맨스에서는 이토록 극단적이지 않겠지만, 본디 사랑은 이런 맹목적인 형질을 띠고 있다. 작가는 바로 그 사랑의 본질을 이 삭막한 세계관을 빌려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하다.



특히 마지막, 사랑하기 때문에 바다가 윤슬의 숨을 거두는 장면은 이 사랑의 아이러니를 극대화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차피 세상의 폭력에 의해 참혹하게 짓밟힐 운명이라면, 차라리 내 손으로 그 안식을 주겠다는 비이성적인 판단.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이 선택은 결국 살인자와 살해당한 자 라는 두 개의 비극적 결과만을 남길 뿐이다. 연쇄살인범을 죽인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 살인자이듯, 본디 사회의 냉혹한 원칙은 개인의 처절한 사정을 전부 고려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맹목적인 비극은 기이하게도 억압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부조리한 반항과 맞닿아 있다. 초능력자를 혐오하는 압도적인 폭력의 세상 속에서, 바다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타인의 손에 윤슬이 처참히 부서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뿐이었다. 세상의 눈에는 그저 끔찍한 살인일지라도, 그들만의 닫힌 세계 안에서는 예정된 파멸로부터 서로를 영원히 구원해 낸 가장 극단적이고 완전한 사랑의 형태였던 것이다.



작가는 이 잔혹한 비극을 대단히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냄으로써 슬픔의 미학을 완성한다. 그 다정한 잔인함은 두 주인공의 이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고, 바다는 그 모든 물결을 넓게 품어내는 거대한 심연이다. 윤슬은 바다가 있어야만 비로소 그 위에서 반짝일 수 있고, 바다 역시 윤슬이 맺힐 때 가장 눈부시게 빛난다. 이름에서부터 이미 서로가 아니면 성립될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성을 부여받은 두 사람은, 피비린내 나는 세상 속에서도 기어코 서로에게 스며들고 만다.



책장을 덮고 나니, 내 주변의 시간은 여전히 멈춤 없이 흘러가고 있다. 나는 초능력이 없고, 세상의 시간을 단 1초도 멈춰 세울 수 없다. 하지만 윤슬과 바다의 파괴적인 사랑을 목도하고 난 뒤, 나는 역설적으로 이 멈추지 않는 평범한 시간이 얼마나 다행이고 소중한 것인지 깨닫는다. 거창한 구원이나 처절한 비극 없이도, 그저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아쉬워하며 헤어질 수 있는 평온함 말이다.



다음번 데이트에서 여자친구를 만나면,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는 장난 대신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녀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어야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소설 속 세상처럼 가혹하지 않음에 안도하며, 우리의 유한한 시간 속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얼빠지고 멍청한 사랑을 맘껏 해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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