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사랑한다. 물론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시간도 그 나름의 벅찬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누군가와 동행하는 여정은 내게 여행이라기보다는 즐거운 휴양 혹은 놀이라는 개념에 훨씬 가깝다. 내가 온전히 정의하는 진정한 여행이란, 일상의 익숙한 궤도를 벗어나 낯선 시공간에 나를 던져두고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사소한 것들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행위다.
혼자 걷는 길에서는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난다. 처음 보는 건축물의 낯선 생김새를 가만히 관찰하고,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내 동네와 달리 언제든 길을 잃을 수 있다는 묘한 긴장감 속에서 이름 모를 골목의 풍경을 기억 속에 차곡차곡 새겨 넣는다. 화려하게 꾸며진 관광 명소보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낡은 간판이나, 골목 어귀 소박한 식당이 내어주는 뜻밖의 온기에 묵직한 감동을 느끼는 순간들. 그것이 내가 기꺼이 고독을 자처하며 배낭을 메는 이유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익숙한 국내보다 아예 다른 언어를 쓰는 해외가 훨씬 매력적인 무대가 된다. 내가 낯선 이국땅을 선호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곳의 사람들과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명백한 제약 때문이다. 사실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을 날아가 수많은 국경을 넘어도, 막상 그곳에 발을 딛고 주변을 둘러보면 사람 사는 모습은 지구촌 어디나 비슷하다는 뻔한 진리를 마주하게 된다. 아침이면 바쁘게 일터로 향하고, 해가 지면 피로를 풀며 소박하게 웃고 떠든다. 하지만 이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풍경 속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철저한 이방인이 되어 덩그러니 놓일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모국어를 어떻게 다루고 있었는지, 타인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해 왔는지를 뼈저리게 되돌아보게 된다.
본래 대화란 단순한 정보의 교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와 문장 사이에는 반드시 말하는 이의 감정과 미세한 체온이 실려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그리고 나 자신조차 대화에서 감정이라는 번거로운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타인에게 감정을 숨긴 채 용건만 건조하게 전달하는 통보식 소통에 젖어 들었다.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고, 불필요한 사족은 달지 않으며, 오해를 살 만한 감정적 여지는 철저히 차단해 버린다.
효율성을 핑계로 이런 방식의 대화를 고집하다 보니, 이제는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잦아졌다. 인간관계의 피로도를 줄이고자 선택한 단절 속에서, 어쩌면 나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가장 따뜻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독은 분명 인간에게 얽매이지 않는 고요한 자유를 허락하지만, 결국 굳게 닫힌 입술을 열고 환하게 웃게 만드는 것은 타인과의 다정한 눈맞춤과 대화뿐이다. 아무리 절대적인 자유를 얻는다고 한들, 마주 보며 웃어줄 누군가가 없다면 그 차가운 자유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바로 이러한 현대인의 군중 속 고독과 소통의 부재를 완벽하게 포착해낸 작품이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인파로 넘쳐나는 거대 도시 도쿄. 그러나 그 속에서 철저한 이방인으로 겉도는 두 남녀의 모습은, 혼자 떠난 낯선 해외여행에서 내가 느꼈던 묘한 단절감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다. 주인공 밥은 한때 찬란하게 빛났지만 이제는 쇠락해 가는 중년의 할리우드 스타로, 우스꽝스러운 위스키 광고 촬영을 위해 도쿄를 찾았다. 반면 샬롯은 명문대를 막 졸업하고 유명 사진작가인 남편의 출장길에 동행했지만, 일에 빠진 남편 탓에 온종일 최고급 호텔 방에 방치된 젊은 여성이다. 화려하지만 지독하게 낯선 도시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길을 잃은 채 각자의 삶이 던지는 무거운 권태에 짓눌려 있다.
시차 적응 실패와 삶의 방향성 상실로 인해 깊은 불면증에 시달리던 두 사람은, 잠들지 못하는 도쿄의 밤을 달래기 위해 홀로 내려간 호텔 바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살아온 세월도, 성별도, 도쿄에 오게 된 이유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이지만, 이들은 서로의 피곤한 눈동자 속에서 기시감처럼 겹쳐진 깊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교집합을 단숨에 알아본다. 말이 통하지 않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오직 서로의 언어만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주파수가 되고, 두 사람은 도쿄의 거리를 함께 거닐며 짧은 시간 동안 그 어떤 오랜 인연보다 강렬하고 특별한 유대감을 쌓아간다.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뼈아픈 역설은, 밥과 샬롯 모두 법적으로는 분명한 배우자가 존재하는 기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숨 막히는 고독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갉아먹는 외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물리적인 혼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진실한 소통의 부재에 있다.
미국에 있는 밥의 아내는 팩스와 전화로 끊임없이 연락을 취하지만, 정작 낯선 타지에서 남편이 겪는 짙은 우울감과 피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녀의 신경은 오로지 새로 단장할 서재의 타일 종류와 카펫의 색깔에만 쏠려 있을 뿐이다. 샬롯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화려한 연예계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 데 열중한 나머지, 텅 빈 눈빛으로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내의 위태로운 내면을 전혀 읽어내지 못한다.
가장 단단하고 깊게 뿌리내려야 할 부부라는 관계에 감정의 교류가 증발해버리면서, 두 사람의 삶에는 본인들조차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미세한 마음의 틈이 생겨났다. 그리고 도쿄라는 낯선 환경, 익숙한 일상의 언어가 완벽하게 차단된 이 고립의 공간은 그 작은 틈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쩍 갈라지게 만들었다. 만약 샬롯의 남편이 무심하게 등을 돌려 잠드는 대신 아내의 우울한 표정을 마주 보며 "오늘 하루는 어땠어?"라고 진심을 담아 물었다면 어땠을까. 밥의 아내가 벽지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모처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편의 지친 한숨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도쿄의 밤하늘 아래서 밥과 샬롯이 서로에게 기대어 위로를 구하는 그 아련한 랑데부는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가까워야 할 인생의 파트너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하며 느끼는 지독한 고립감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처음 본 완벽한 타인에게서 위로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씁쓸하고도 시린 여운을 남긴다. 도쿄의 화려한 야경 속에서도 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이들은, 비로소 서로의 상처와 고독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진정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잠을 청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피로를 달래는 수면이 아니었다. 온전한 이해와 공감이 오가는 소통만이 우리의 텅 빈 내면을 채우고, 마침내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준다는 아름답고도 슬픈 증명이었다. 동시에 이 역설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가까운 이들과 진짜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감정을 거세한 나의 대화 방식은, 어쩌면 샬롯과 밥이 겪었던 막막한 불면의 밤을 스스로 자초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도시에서의 여정이 나침반 없는 항해처럼 느껴지듯, 감정이 빠져버린 대화가 오가는 관계 역시 결국엔 서로를 잃어버리는 텅 빈 메아리에 불과하다. 인간을 참된 의미로 숨 쉬게 하고 미소 짓게 만드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닫힌 문을 두드리는 다정한 관심과 체온이 묻어나는 진실한 대화 한마디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