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h you were gay - Billie Eilish
빌리 아일리시의 음악을 처음 접한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내가 아직 교복을 입던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그녀는 지금처럼 전 세계가 열광하는 팝스타가 아니라, 취향이 맞는 소수의 사람만 알음알음 찾아 듣는 인디 아티스트에 가까웠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오르긴 했지만, 적어도 당시 교실에 앉아있던 내 친구들 중 그녀가 이렇게 거대한 아이콘이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우리 학교 교실에는 스마트폰과 스피커를 연결할 수 있는 AUX 선이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8교시 정규 수업이 끝나고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 그 짧고 어수선한 쉬는 시간마다 스피커에 내 휴대폰을 연결해 음악을 틀곤 했다. 내게 음악을 선곡할 특별한 권위가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친구들은 모바일 게임을 하느라 바빴기에 굳이 귀찮게 선을 연결하려 들지 않았을 뿐이다. 덕분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마음껏 틀 수 있었고, 다행히 친구들도 내 선곡을 꽤 좋아해 주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파도타기 하며 새로운 음악을 발굴하는 것이 소소한 취미였던 나는 어느 날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를 발견했다. 나른하고도 우울한 그 특유의 음색에 단숨에 매료된 나는 다음 날 어김없이 교실 스피커로 그녀의 노래를 틀었다. 하지만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한 명의 친구를 제외하고는 다들 "노래가 너무 우울하다", "그렇게 유명해질 것 같지는 않은데?"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위상을 본다면 당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속으로 묘한 승리감을 느끼며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그 시절, 교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던 낯선 목소리에 무심한 평가를 내리던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서 어떤 음악을 들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빌리 아일리시의 음악은 인간 내면의 솔직하고 때론 찌질한 감정들을 가감 없이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녀의 수많은 명곡 중에서도 『wish you were gay』는 특히나 공감 가는 방어기제를 노래한다. 이 곡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학창 시절, 미숙한 감정들이 얽히고설키던 그때의 풍경이 떠오른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2월 중순에도 학교에 나갔다. 이는 곧 학생들이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의 들뜬 분위기를 교실에서 고스란히 겪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시즌이 되면 유독 재미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이른바 '광역기인 척 궁극기를 쓰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특별한 마음을 담은 선물을 특정한 단 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지만, 혹여나 거절당해 체면을 구길까 두려워 다수의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돌리는 척하며 진짜 마음을 숨기는 작전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귀여운 위장 전술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일단 돈이 없었고, 애석하게도 그 맘 때쯤에는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고등학교 재학 내내 같은 학교 여학생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은 적이 없다. 당시 유행하던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다른 학교 학생이나 동네 교회 친구에게 마음이 향했던 적은 있어도,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교내에서는 철저히 감정을 통제했다.
그것은 일종의 선제적인 자기방어 기제였다. 남녀공학 특유의 좁은 생태계는 종종 예능 프로그램인 '정글의 법칙'이나 현실판 '환승연애'를 방불케 했다. 내 친구의 전 여자친구가 어느새 다른 친구의 현 여자친구가 되어 있고, 엊그제까지 죽고 못 살던 커플이 헤어진 뒤 싸늘한 기류를 뿜어내며 같은 공간에서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내 친구들 역시 그런 청춘 시트콤 같은 소동에 휩쓸려 골머리를 앓곤 했다. 나는 이별 후에 찾아올 그 복잡하고 불편한 후폭풍이 두려웠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섣불리 호감을 표시하지 않았고, 반대로 누군가 내게 호감을 보여도 애써 모른 척 선을 그었다. 지금이라면 상대방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끔 유연하고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겠지만, 방어벽을 세우는 데만 급급했던 그 시절의 나는 서투른 거절로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곤 했다. 누군가의 순수한 마음을 밀어내고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유쾌한 행동은 아니다.
성숙하지 못한 자기방어 기제가 타인에게 얼마나 예리한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교내 또래 상담부 활동을 하며 다양한 심리적 방어기제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다. 흥미롭게도 교육을 통해 배운 이론은 내 일상 속에서 곧장 증명되었다.
입시 스트레스와 친구 문제로 신경이 몹시 날카로워져 있던 고3 어느 날, 오랫동안 편한 친구로 지내왔던 한 여학생이 내게 갑작스러운 고백을 해왔다. 그녀를 단 한 번도 이성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던 나는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며 고백을 거절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거절당한 그녀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거절한 이유가 '내 친구를 짝사랑하기 때문'이라며 나를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나와 내 친구의 비밀스러운 관계 때문에 피해를 본 희생양인 양 주변에 억울함을 토로했다.
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진실은 이랬다. 나와 그녀가 오해한 '내 친구'는 그저 같은 동아리 부원이었고, 동아리 회식이 끝난 뒤 우연히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몇 번 함께 걸어갔을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그 친구는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나의 친구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나와 그 친구가 페이스북 메신저로 나눈 대화의 8할도 그 남자애에 관한 상담이었다. 나와 나에게 고백했던 그녀, 그리고 동아리 친구 사이에는 그 어떤 로맨틱한 기류도 없었다. 상황을 해명하고 당황해야 할 사람은 난데, 오히려 내가 죄인이 된 듯한 적반하장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에야 웃어넘길 수 있는 학창 시절의 삼류 시트콤 같은 에피소드지만,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뒤집어쓴 탓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방어기제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그녀의 억지스러운 행동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빌리 아일리시의 'wish you were gay' 속 화자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가 '내가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물론 화자 스스로도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네가 관심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To spare my pride, To give your lack of interest an explanation)" 차라리 그런 황당한 핑계라도 찾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 거짓 프레임을 씌웠던 그 친구의 마음도 이 노래 가사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부족하고 매력이 없어서 거절당했다'는 비참한 사실을 맨정신으로 마주하기엔 어린 그녀의 자존심이 너무 크게 다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별로인 게 아니라, 쟤가 이미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패한 거야'라는 서사를 급조해 내어 자신의 상처받은 에고를 보호하려 했다. 그것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인간의 찌질하고도 절박한 본능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짝사랑을 겪는다. 이는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로맨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간절히 원하지만 닿을 수 없는 꿈, 수백 번의 이력서를 넣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직장, 아무리 노력해도 내 맘처럼 써지지 않는 글 등, 우리가 욕망하지만 우리를 밀어내는 삶의 모든 대상이 곧 짝사랑이다.
상대가 사람이든 꿈이든, 거절의 벽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상처받기 전에 빠르게 포기하고 돌아설 것인가, 아니면 노래 속의 카운트다운처럼 끊임없이 무시당하고 거절당할 용기를 내어 계속 부딪혀 볼 것인가.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미련 없이 털어내는 것이 이롭다고들 하지만, 인간이 무언가를 깊이 열망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하루아침에 포기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쿨하게 포기했다고 스스로를 속여도 미련은 자꾸만 발목을 잡고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반대로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마음을 쏟는다면 결국 피를 흘리게 된다. 내가 좇는 대상이 실체가 없는 무형의 꿈이라면 온전히 나 혼자 베이고 다치겠지만,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엇갈린 감정의 무게에 짓눌려 결국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만다. 우리는 그저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꺼내어 놓았을 뿐인데, 그 순수한 마음이 아무런 잘못 없는 상대방을 무겁게 짓누르고 아프게 하는 무기가 되는 모순을 겪는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삶을 영위하고 무언가를 욕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다. 상처받지 않으려 마음을 닫아걸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나도, 거절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나를 모함했던 그 친구도, 짝사랑의 비참함을 견디다 못해 네가 차라리 게이였으면 좋겠다고 읊조리는 노래 속의 화자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 이기적인 변명을 늘어놓고, 때로는 타인을 할퀴면서까지 내 자존심을 지키려 발버둥 친다.
'wish you were gay'의 씁쓸한 고백 뒤에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나 들릴 법한 인위적인 가짜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깔린다. 어쩌면 그 웃음소리는 '우리가 이렇게나 이기적이고 찌질한 존재들이지만, 그래도 뭐 어쩌겠어. 이게 사람인 걸'이라는 서글픈 자조이자 위로인지도 모른다.
교실 스피커로 빌리 아일리시를 처음 틀었던 10년 전 그날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여러 번 누군가의 마음에 부딪히고, 또 누군가의 마음을 거절하며 조금은 덜 다치고 덜 상처 주는 법을 배워왔다. 하지만 여전히 간절히 원하는 것들 앞에서 거절당할 때면, 불쑥불쑥 나침반을 잃은 방어기제가 고개를 들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이 오래된 노래를 꺼내 듣는다. 나의 초라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직면하는 것은 여전히 부끄럽고 아프지만, 그 찌질함조차도 내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그토록 진심으로 원했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