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파수꾼 - 히가시노 게이고
대학생 시절, 한여름의 도쿄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매미 소리가 귓가를 강타하고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무척이나 더운 여름이었다. 체감상 일본 특유의 습하고 무거운 더위는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게 느껴졌다. 나는 3박 4일의 빠듯한 여행 내내 턱끝까지 차오르는 갈증을 달래려 습관처럼 아이스 커피를 찾았다. 타지에 온 만큼 현지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끼고 싶어 주로 골목 어귀의 개인 카페나 이색적인 찻집을 이용하려 애썼다. 여담이지만, 나는 어느 여행지를 가든 그곳의 스타벅스는 꼭 한 번씩 들르는 습관이 있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현지인들이 가장 부담 없이, 일상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공간이 바로 그곳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행 이튿날. 복잡한 신주쿠를 떠나 바다가 있는 가마쿠라로 넘어가던 날, 기차 시간이 너무 촉박해 여유롭게 카페에 들를 틈조차 없었다. 갈증은 나고 시간은 없어 급한 대로 눈앞에 보이는 작은 편의점에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냉장 매대 한구석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바로 한국에서 지겹도록 즐겨 마시던 '조지아 블랙 커피'였다.
그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당시 내게 일상 그 자체이자 생존 필수품 같은 것이었다. 공대생이었던 나는 빽빽한 전공 수업을 따라가고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숱한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했다. 새벽의 무거운 졸음과 피로를 쫓아낼 때면 내 책상 위에는 늘 그 투박한 페트병 커피가 놓여 있었다. 수많은 커피 중에서 굳이 그것을 선택했던 이유는 대단한 향이나 맛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자취방 오가는 길에 자주 들르던 식자재 마트에서 가장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카페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20대 초중반, 그 쌉싸름한 맛은 내 청춘의 배경음악처럼 늘 깔려 있었다.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코카콜라나 맥도날드처럼 글로벌 기업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상품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하게 된다. 스무 살,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갔을 때는 그저 글자만 다른 똑같은 상품들이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여행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런 감흥에도 점차 무뎌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날 가마쿠라행 기차를 타러 가는 길에 마주친 그 커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정으로 다가왔다. 똑같은 플라스틱 페트병, 혀끝에 닿는 똑같은 쓴맛, 오로지 겉면의 라벨만 낯선 일본어로 적혀 있는 그 평범한 커피를 손에 쥔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왠지 모를 깊고 묵직한 감동이 밀려왔다. 화려한 도쿄 타워의 야경 앞에서도, 파리의 에펠탑이나 독일의 웅장한 쾰른 대성당,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샌즈 같은 세계적인 명소 앞에서도 굳이 셀카를 꺼내지 않던 나였다. 그러나 나는 그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일본의 어느 평범한 길모퉁이에서 그 낡은 커피병을 들고 정성스레 사진을 남겼다.
당시 함께 여행하던 친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왜 그런 평범한 커피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나는 입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낯선 타지에서 불쑥 마주친 나의 팍팍했던 일상에 대한 묘한 위로, 혹은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안도감과 반가움이 뒤섞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어떤 단어들을 조합해 보아도, 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그 벅찬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얄팍하게 느껴졌다. 결국 내 입술과 혀는 적절한 문장을 찾지 못하고 길을 잃고 말았다. 그때는 그저 내 어휘력이 부족하거나 표현력이 서툰 탓이라 자책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예고 없이 삶에 들이닥치는 벅찬 감동과 진심은 본디 인간의 빈약한 언어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일 테다.
인간의 언어가 가진 그 씁쓸한 한계. 그것이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 『녹나무의 파수꾼』을 읽으며 깊이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사실 이 책을 구매하여 서재에 꽂아둔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도통 손이 가지 않아 방치해 두고 있었다. 500쪽이 거뜬히 넘어가는 묵직한 물리적 분량도 부담스러웠고, 무엇보다 '녹나무의 파수꾼'이라는 제목이 내게 큰 흥미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근, 이 잔잔한 소설이 화려한 영상미를 자랑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로 개봉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그제야 나는 묘한 호기심에 이끌려 헐레벌떡 책장에서 먼지 쌓인 책을 꺼내 첫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천애 고아로 팍팍하고 불우하게 자라온 청년 '레이토'가 있다. 그는 직장에서 억울하게 부당 해고를 당한 후, 세상에 대한 분노와 홧김에 직장의 기계를 훔치려다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바닥까지 떨어진 그의 인생에, 그때까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이모 '치후네'가 홀연히 나타난다. 유능하고 깐깐한 그녀는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 레이토를 위기에서 구해준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그 대가로 이모는 레이토에게 월향신사라는 외딴곳에 자리한 거대한 '녹나무'를 지키는 '파수꾼'이 될 것을 엄격하게 명한다. 이 신비하고 영험한 녹나무에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잊히지 않는 기억을 온전히 저장하는 기적 같은 힘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오직 피가 섞인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만이 특정한 날, 특정한 의식을 통해 그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다. 레이토는 처음에는 툴툴거리며 마지못해 파수꾼 역할을 수행하지만, 녹나무를 찾아와 진심을 맡기고 또 찾아가는 사람들의 애틋한 사연과 무거운 비밀들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던 청년은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며 서서히 성장해 나가고,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 깊이 깨달아간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이고도 신비로운 설정은 바로 '예념'과 '수념'이라는 의식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깊은 사연을 품고 캄캄한 그믐밤에 녹나무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진심을 예념하고, 남겨진 이들은 보름밤에 찾아와 그 마음을 수념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고 가슴을 울렸던 대목은 단연 사지 아키라의 '피아노 에피소드'다.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였던 아키라는 죽기 전, 하나뿐인 동생에게 남길 마지막 메시지로 평범한 편지나 글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활자 대신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선율 자체를 녹나무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음악적 재능이라곤 없던 평범한 동생은 기나긴 실패와 좌절 끝에, 마침내 그 선율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형이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했던 미안함과 깊은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하나의 선율이 만들어낸 거대한 기적. 예술이라는 것은 이처럼 글자가 닿지 못하는 심연의 감정을 건져 올리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나는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초등학생 무렵, 우연히 비틀스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날이 있었다. 영어를 제대로 알 턱이 없었으니 가사의 뜻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귓가를 맴도는 그들의 목소리와 멜로디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세상이 충만해지는 듯한 벅찬 감동을 느꼈다. 아키라의 동생이 형의 선율을 통해 사랑을 깨달은 것도 필시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예술이란 결국 사람의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고도의 장치이며, 그 표현의 방식이다. 물론 평론가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감하느냐, 혹은 형식적으로 얼마나 완벽하느냐를 따져 훌륭함의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하지만 예술의 본질은 그런 평가에 있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소음처럼 들리는 쓰레기 같은 음악일지라도, 다른 누군가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눈물짓게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 대체 불가능한 인생곡이 된다. 예술을 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나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세간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확고한 주관을 가질 때,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가치관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단단한 가치관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 자체를 더욱 풍요롭게 이해하는 데 든든한 나침반이 되어준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이윽고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극장에서 감상했다. 활자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한 영상은 확연히 다른 질감의 감동을 선사했다.
가장 먼저 다가온 차이는 영상 매체 특유의 폭발적인 시각적 극대화다. 소설을 읽을 때 사람들의 염원이 녹나무에 저장되고 혈연에게로 흘러가는 초자연적인 과정은 오롯이 독자 개인의 상상력에 의존해야 했다. 반면 영화는 거대한 녹나무가 달빛을 받아 뿜어내는 신성한 아우라와 타인의 기억 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환상적인 경험을, 숨이 멎을 듯 아름답고 서정적인 작화로 스크린에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두 번째는 이야기의 압축과 속도감에서 오는 몰입도였다. 500쪽이 훌쩍 넘는 방대한 원작의 서사를 114분이라는 한정된 상영 시간 안에 담아내기 위해, 영화는 주변 인물들의 잔가지들을 과감하게 쳐내는 선택을 했다. 소설이 주인공 레이토의 찌질한 일상과 깐깐한 이모 지후네와의 티키타카, 그리고 녹나무를 찾는 여러 방문객들의 숨겨진 사연을 아주 긴 호흡으로 촘촘하게 쌓아 올리는 맛이 있다면, 영화는 곁가지를 덜어낸 자리에 녹나무에 얽힌 거대한 비밀과 굵직한 감동 서사를 속도감 있게 채워 넣어 관객의 멱살을 끌고 간다.
마지막은 청각이 남기는 짙은 여운이다. 소설은 정제된 문장을 입안에서 굴리듯 곱씹으며 인물들의 미세한 감정선을 독자가 스스로, 그리고 천천히 따라가게 만든다. 반면 영화는 평면적인 캐릭터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 성우들의 절절한 목소리 연기와, 감정의 파고를 극적으로 고조시키는 배경 음악을 통해 극 후반부의 감동을 훨씬 더 원초적이고 강렬하게 관객의 가슴에 터뜨린다.
요약하자면, 원작 소설은 얽히고설킨 인간들의 복잡한 심리와 관계성의 묘미를 깊은 호흡으로 음미하고 싶을 때 탁월한 선택이다. 반면 애니메이션 영화는 신비로운 판타지적 세계관을 경이로운 영상미와 심장을 울리는 음악으로 직관적이고 흠뻑 취하듯 즐기고 싶을 때 제격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기인 추리적 요소는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등장인물들의 과거 서사에 은밀하게 깔린 떡밥들을 찾아내고 이를 후반부에 절묘하게 회수하는 과정은 혀를 내두를 만큼 흥미롭고 짜릿하다. 하지만 책과 영화를 모두 소화하고 난 뒤 깨달은 것은, 이 소설에서 그러한 추리적 기법이나 반전 요소는 그저 독자를 몰입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결국 작가가 수백 페이지의 글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궁극적인 메시지는, 서두에 언급했던 내 도쿄의 경험처럼 '인간의 언어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하며, 마음속 깊은 바닥에 있는 진짜 진심을 말이라는 그릇에 모두 담아 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진실이다. 말로는 결코 가닿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 그러나 소설 마지막, 모든 기억을 잃어가는 치후네 이모가 남긴 체념 섞인 위로의 말처럼, 그저 서로를 피하지 않고 가만히 마주 보고 앉아 있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언어를 뛰어넘어 전해지는 무언가는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조지아 블랙 커피를 즐겨 마신다. 물론 그때 도쿄의 이름 모를 편의점 앞에서 느꼈던 벼락같은 감동이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함에 속아 무덤덤하게 병을 비우는 날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쌉싸름한 냄새를 맡을 때면 아주 가끔씩, 땀방울을 흘리며 골목을 걷던 그날의 후덥지근한 공기, 친구의 물음에 당황하던 찰나의 침묵, 그리고 치열하게 밤을 새우던 스무 살 무렵의 조각난 일화들이 거짓말처럼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대학생 시절의 방황, 쫓기듯 휴학을 결심했던 날들, 긴장감으로 배탈이 났던 인턴 첫 출근길, 배낭 하나 메고 떠났던 여행의 순간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어른이 될 때까지. 앞으로도 나와 이 커피가 함께 만들어갈 에피소드들은 나의 시간에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다채롭고 아름답게 채색하는 것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거창한 성취나 스펙터클한 사건이 아니다. 일상의 길목에 숨어있는, 너무도 사소해서 자칫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작고 다정한 기억들이 모여 비로소 한 사람의 고유한 인생을 빚어낸다. 인간이 끊임없이 일기를 쓰고 글을 남기며 무언가를 기록하려 애쓰는 것도, 이 소중한 찰나들이 무정한 시간 속으로 속절없이 잊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려낸 월향신사의 거대한 녹나무만이 사람의 애틋한 기억과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무심코 집어 든 그 투박한 조지아 블랙 커피 한 병이, 또는 계속해서 추가되는 새로운 포켓몬들이, 또는 내가 읽은 많은 책들이 나의 지나온 시간과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저장해 두는 나만의 영험한 녹나무인 셈이다. 언젠가 나침반을 잃고 삶이 퍽퍽하게 느껴질 때, 나는 다시 나만의 녹나무를 찾아가 잊고 있던 내 안의 진심을 수념할 것이다. 말없이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의 시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