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inding Lights - The Weeknd
도시는 화려하다. 지나치게 화려하다. 내가 서 있는 이 도시의 밤하늘은 빽빽하게 들어선 마천루와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뒤엉켜 한 번도 짙은 어둠을 허락한 적이 없다. 전쟁의 위협이 감돌든, 계엄령이 떨어지든, 심지어 전 세계가 유례없는 팬데믹의 공포에 처하든 도시의 불빛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치 이 도시의 불빛을 한겨울 생명줄 같은 연탄불이라도 되는 양 어떻게든 살려두려 발버둥 친다. 자본과 욕망이 뒤엉킨 거대한 스캔들이나 범죄가 터져도, 도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네온사인을 번쩍이며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물론 그 불빛 아래에서 쾌락을 좇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피로에 전 눈을 비비며 야근을 견디는 직장인,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올리러 가는 사람의 발걸음도 그 불빛 아래 함께 녹아 있다. 도시는 철저히 무심하지만, 그 무심함 덕분에 모든 삶의 양태를 평등하게 비춘다.
2020년, 전 지구의 거리에서 춤과 음악이 증발했다. 사람들은 마스크라는 하얀 천 뒤로 입 모양과 표정을 숨겼고, 타인을 잠재적 위협으로 여기며 서로 거리를 두어야 했다. 새 학기의 들뜸과 알코올 냄새로 한창 떠나갈 듯 시끄러웠을 3월의 대학가도 그때만큼은 무겁게 가라앉아 침묵했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사라진 텅 빈 거리, 하지만 그 정적 속에서도 도시의 간판들은 여전히 눈이 시리도록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신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이 문명에게 잠시 멈춰 숨을 고르라고 질병을 보낸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신의 경고를 고분고분 듣는 법이 없다. 사람들은 마스크에 의지한 채 꾸역꾸역 만원 지하철에 올라 출근을 했고, 전광판에 오르내리는 사망자 수를 보면서도 고통은 늘 남들의 몫일 뿐이라 애써 외면하며 일상을 굴려 나갔다.
나의 첫 조카는 그토록 고요하고 단절되었던 2020년에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 조그맣고 부서질 것 같던 아이가 처음 우리 집에 당도했던 순간의 공기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조카의 심장은 마치 소형차에 거대한 제트기 엔진을 단 것처럼 힘차게 박동하고 있었다. 지능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그 작은 짐승에게도 생존을 향한 지독한 본능이 꿈틀거렸는지,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면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핏줄이 서도록 꽉 쥐곤 했다. 남의 아이는 금방 큰다는 옛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내가 휴학을 결정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누워만 있던 조카는 이미 제법 단단해진 두 다리로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성인의 얼굴 절반을 가리는 답답한 마스크를 쓴 채 거실을 누비는 아이의 경이로운 걸음마는, 팬데믹이 드리운 짙은 우울감과 아버지의 항암 치료로 인해 늪처럼 침울해져 있던 우리 가족에게 더없이 소중한 웃음이었다. 죽음과 질병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집안에, 아이는 폭발적인 생명력 하나로 새로운 숨통을 트여 주었다.
가장 개인적이고 지독하게 단절되었던 그 시기, 역설적이게도 전 세계의 고립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며 가장 크게 울려 퍼진 곡이 있었다. 바로 위켄드의 'Blinding Lights'다. 불확실성의 공포 속에서 영화와 음악을 포함한 수많은 대중예술이 몸을 사리며 세상 밖으로 나오길 꺼렸을 때, 이 노래는 홀로 차트를 질주하며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워 나갔다. 이 곡이 주는 압도적인 청각적 쾌감은 고막을 예리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신시사이저 전주에서 비롯된다. 80년대의 향수를 머금은 이 전주를 듣는 순간, 누구든 텅 빈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내달리는 듯한 아찔한 해방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위켄드는 항상 "리스크 없이는 리턴도 없다"라고 읊조리던 아티스트다. 그의 그 오만한 듯한 자신감과 철학은 이 곡의 발매 과정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모두가 발매 일정을 미루고 엎드리며 손익을 계산할 때, 그는 우직하게 계획대로 앨범을 밀어붙였고 보기 좋게 시대를 관통했다. 비슷한 시기, 두아 리파 역시 훌륭한 레트로 사운드의 음악을 선보이면서 이들이 쏘아 올린 80년대 디스코와 신스팝의 부활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현재까지도 대중음악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사실 위켄드의 그간 행보를 찬찬히 되짚어보면 이러한 뚝심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이 빌보드 차트를 무자비하게 폭격하던 2010년대 초, 그는 유명 DJ의 곡에 목소리를 빌려주며 쉽게 인기를 얻는 타협의 길을 거부했다. 대신 오로지 자신만의 끈적하고 우울하며 독창적인 목소리로 가득 채운 R&B 믹스테이프를 고집스레 빚어냈다. 당시 주류 음악계에서 이런 과감하고 엇나간 시도를 한 아티스트는 프랭크 오션 정도를 제외하면 전무했다. 묵묵히 자신만의 심연을 개척한 그는, 훗날 팝의 거장 맥스 마틴과 기꺼이 손을 잡았고, 그 결과 과거의 아련한 향수와 가장 현대적인 세련미를 완벽하게 구현해 낸 팝의 황홀경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곡의 멜로디가 뿜어내는 끝없는 흥겨움의 이면에는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다. 위켄드는 인터뷰를 통해 이 곡의 진짜 테마가 음주 운전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늦은 밤, 알코올에 취해 이성이 마비된 상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기어코 운전대를 잡았을 때, 마주 오는 차들의 폭력적인 헤드라이트나 가로등 불빛에 눈이 멀 것 같은 위험천만하고 환각적인 상태를 묘사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팝 사운드의 탈을 쓴 채, 그 속에는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치명적이고 어두운 경고를 담아낸 셈이다. 꺼지지 않는 화려한 도시의 불빛 속에서 오히려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위태롭게 달리는 화자의 모습은, 묘하게도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 속에서 길을 잃고 비틀거리던 우리의 자화상과 겹쳐 보인다.
노래 속 화자는 그 화려함 속에서도 사무치게 외로워 누군가의 온기를 지독하게 갈망한다. 도시의 차가운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환각 속에서,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손길을 찾는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수많은 현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이 고독해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며,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서 벗어나야 진짜 행복에 닿을 수 있다고 설파한다. 만약 그것이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이라면, 우리는 왜 이토록 끊임없이 타인의 살갗과 끈적한 관계를 갈구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원래 그렇게 결핍을 안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다면 자연 상태에서는 보잘것없는 짐승 한 마리 이기지 못할 나약한 존재,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하지만 우리는 문명이 쌓아 올린 이 거대한 도시의 콘크리트 숲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와 자신을 저울질하고, 기어코 타인의 우위에 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순을 짊어지고 산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를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그 허영의 쳇바퀴에 몸을 던진다. 도시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욕망의 잔상을 보여주고,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게 하며, 결국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빼앗아 버린다.
스무 살의 나는 홍대와 부평의 밤거리를 참으로 부지런히도 배회했다. 저녁 7시에 무리 지어 밤의 세계로 뛰어들면, 동이 트는 다음 날 아침에야 풀린 다리로 기어 나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처음 지하철을 타고 그 화려한 거리로 향할 때의 기분은 터질 듯 신나고 짜릿했다. 실제로 순간순간 뇌리를 강타하는 밤의 쾌락에 깊이 중독되어 있었기에 나의 주말은 늘 알코올과 소음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모든 불빛이 초라해지는 아침, 첫차를 타고 덜컹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뼛속까지 스며드는 그 지독한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맑은 얼굴로 셔츠를 쫙 빼입고 각자의 하루를 향해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데, 나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구석 자리에 웅크려 있었다.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허락된 유한한 시간을, 눈먼 쾌락에 눈이 멀어 의미 없이 탕진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첫차의 형광등 불빛만큼이나 나를 아프게 찔렀다. 위켄드의 가사처럼, 나는 화려한 불빛에 눈이 멀어 진짜 쫓아야 할 삶의 방향을 잃은 채 위태로운 질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 밤거리를 떠돌던 그 시절의 풋내기 주정뱅이는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스마트폰 화면과 무의미한 고민들 속에서 시간을 꽤나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코로나라는 거대한 재난을 잊고 다시 예전의 속도로 돌아가 버렸고, 마스크를 쓰고 뒤뚱거리던 작은 조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일곱살 꼬마가 되어 나에게 포켓몬스터 강의를 해달라며 떼를 쓴다. 한때 병마와 싸우며 쇠약해졌던 아버지는, 지금은 다 큰 성인인 나보다 훨씬 더 강단 있고 힘이 세진 듯 든든한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내가 매일 바라보는 이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거칠고 화려하게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그 불빛은 때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비추는 따뜻한 가로등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Blinding Lights'처럼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시야를 멀게 하는 매혹적인 환각이 되기도 한다. 많은 것이 변해버렸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이 그대로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흐름은 결국 이런 지독한 모순의 연속이자, 필연적인 변화의 반복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나의 남은 인생에 어떤 형태의 재난이나 뼈아픈 시련이 예고 없이 찾아오든, 시간의 풍화 속에 변할 것은 변할 것이고 단단하게 남을 것은 남을 것이다. 이 거스를 수 없는 파도 속에서 한낱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란, 매 순간 화려한 불빛에 눈멀지 않고 그나마 내일 아침에 덜 후회할 만한 최선의 선택을 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것, 오직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