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우주에 던져진 이방인

프로젝트 헤일메리

by 요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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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당대의 사회적 문제와 대중의 집단 무의식, 그리고 역사적 상흔을 날카롭게 담아내는 기록물이다. 한 편의 영화를 제대로 읽어낸다는 것은 곧 그 작품이 탄생한 시대의 맥락과 문화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영화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오락거리를 넘어, 시대를 반추하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기르는 훌륭한 교양 텍스트다.


그래서 혹자는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 부른다.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진 인류의 전통 예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공간을 점유하는 건축, 조각, 회화가 있고, 시간의 흐름을 타는 음악, 문학, 무용이 있다. 영화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 스크린이라는 캔버스 위에 문학적인 서사를 쌓아 올리고, 빛과 음악으로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정지된 공간 예술과 흘러가는 시간 예술이 완벽하게 결합한 궁극의 형태인 셈이다.



이 거창한 명제를 꺼내든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고 나서 참으로 오랜만에 ‘역시 영화는 예술이다’라는 전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처음 예술로 자각한 순간은 《비긴 어게인》을 보았을 때였다. 음악과 서사가 어우러져 스크린 너머로 쏟아지던 그 감각적인 체험은 나를 완전히 들뜨게 했다.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살아있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러나 모든 강렬한 처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부터 영화 관람은 그저 남는 시간을 때우는 습관적인 소비로 전락했다. 훌륭하고 재미있는 작품도 많았지만, 관성적인 시청 속에서 화면은 그저 평면적인 빛의 일렁임에 불과했다. 내 내면의 무언가를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달랐다. 이 영화는 시각적 압도감, 청각적 경이로움, 그리고 서사적 깊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오랫동안 메말라 있던 나의 감각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이야기는 끝없는 칠흑 속에서 시작된다. 우주선 ‘헤일메리호’에서 긴 동면 끝에 홀로 깨어난 주인공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심각한 기억상실증에 빠져 있다. 시각과 운동 능력마저 저하된 그의 모습은 나약한 인간의 표상 그 자체다.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의 파편 속에서 그는 자신이 중학교 과학 교사였음을, 그리고 태양의 에너지를 갉아먹어 지구를 빙하기로 몰아넣는 외계 미생물 ‘아스트로파지’의 비밀을 풀기 위해 이 자살 미션에 차출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태양계 인근에서 유일하게 아스트로파지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항성 ‘타우 세티’로 파견된 인류 최후의 희망이었다.


우주라는 무한한 진공 상태에 홀로 던져진 그레이스는 그 순간, 우주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독한 존재다. 우주는 인간의 생존과 절망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이 압도적인 부조리 속에서 인간의 이성은 쉽게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홀로 고립되더라도 며칠쯤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다고 자만한다. 하지만 그것은 두 발을 딛고 선 지구가 존재할 때의 이야기다. 지구에서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문을 열고 나가 타인과 체온을 나누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도 몇 년을 가야 하는 우주의 한복판에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철저히 고립된 채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두 개뿐이었다.



이 막막한 부조리의 공간에서 그레이스는 기적처럼 타자와 조우한다. 타우 세티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 온 생명체가 자신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에리다니 성계에서 온 외계 우주선. 그 안에는 거미나 갑각류를 닮았고, 눈이 없으며, 오직 화음으로만 대화하는 외계인 ‘로키’가 있었다. 로키의 모성 역시 아스트로파지로 인해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생김새도, 생물학적 구조도, 의사소통 방식도 완벽하게 다른 두 이방인은 모형과 수학, 그리고 과학이라는 우주의 보편적 언어를 통해 소통의 다리를 놓는다. 종의 경계를 초월한 이 순수한 연대는, 우주의 잔인한 고독을 허물어뜨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둘은 힘을 합쳐 아스트로파지를 포식하는 천적 미생물 ‘타우메바’를 찾아낸다. 이를 배양해 각자의 행성으로 보내면 지구와 에리드 모두를 멸망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애초에 지구로 돌아갈 연료가 없었던 그레이스에게 로키는 자신의 연료를 나누어주며 기꺼이 귀환의 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지구로 귀환하던 중, 그레이스는 치명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타우메바가 변이를 일으켜 로키의 우주선 재질을 먹어 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로키가 이 사실을 모른 채 고향으로 향한다면 그의 행성은 멸망할 것이 자명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레이스는 소형 탐사선에 타우메바와 연구 자료만을 실어 지구로 쏘아 보낸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생존의 기회를 포기한 채, 친구 로키를 구하기 위해 우주선의 기수를 돌린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그레이스는 로키의 고향 행성 에리드에 머물고 있다. 짙은 대기와 강한 중력에 맞춰 특수 제작된 돔 안에서 그는 에리드인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며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로키가 찾아와 그를 지구로 돌려보낼 우주선이 무사히 건조되었으며 원한다면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아는 이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고향 지구로 귀환할 것인가, 아니면 종을 초월한 우정과 새로운 인연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에리드에 계속 남을 것인가. 그레이스가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조용히 갈등하는 모습을 비추며, 극은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그레이스의 여정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그가 처음 우주로 향한 것은 온전한 자의가 아니었다. 인류 구원이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 타의에 의해 떠밀려온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결말부에 이르러 그는 오직 한 명의 이방인 친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던진다. 타의로 시작된 임무가, 개인의 완벽한 자유의지에 의한 가장 주체적인 선택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글의 서두에서 영화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다. 최근 개봉하는 훌륭한 영화들이 유독 ‘연대’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도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갈수록 고립되고 있다.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발적인 고립을 택하지만, 그 이면에는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이 숨어 있다. 우리는 각자의 일상이라는 비좁은 우주선에 갇힌 채 살아가는 고독한 항해사들이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바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우리는 혼자서 생존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타인과의 연대 없이는 결코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 칠흑 같은 우주 한가운데서 완전히 다른 두 존재가 서로를 이해하고 구원했듯, 인간 역시 타인에게 손을 내밀 때 비로소 부조리한 세상을 견뎌낼 의미를 찾는다. 이것이 바로 시대를 관통하여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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