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 - C.S 루이스
신을 믿게 된 순간, 내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결심과 달리, 나의 노력은 고작 타인에게 호감을 얻어내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매 순간 마주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번번이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배반했다. 온전한 선을 열망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기어이 악을 택하고 마는 내면의 모순 앞에서 나는 깊이 절망했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의 태도가 차갑고 냉소적으로 변해버린 것도 아마 그 무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힘으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성경이 말하는 작은 예수가 되는 길은 닿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이 책을 처음 펼쳤던 건, 신앙은 커녕 내 삶의 방향성에 대해 아무런 고뇌조차 없었던 스무 살 무렵이었다. 당시 나의 세계는 오직 친구와 취미, 여행과 여자 같은 즉각적인 즐거움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책을 선물해 주셨던 목사님은 "시간이 흐르면 이 내용이 깊이 와닿을 날이 올 것"이라고 하셨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그 말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삶의 부조리와 내면의 한계를 경험한 지금, 나는 목사님의 그 조용한 확신이 무엇을 뜻했는지 깨닫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지적 흥미를 가장 강렬하게 자극하는 대목은 단연 1장의 자연법에 관한 논증이다. C.S. 루이스는 기독교의 거대한 교리를 설파하기에 앞서, 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의 과거를 증명하듯 전개 방식은 지극히 치밀하고 논리적이어서, 이성적인 사유를 즐기는 독자라면 그의 펜끝을 따라가며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광활한 외부 우주를 탐색하는 대신,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본다.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듯 자연계에 물리적 법칙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내면에도 누구나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느끼는 객관적인 기준, 즉 도덕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도덕이 시대나 문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한다는 주장을 일축한다. 고대 이집트, 바빌론, 인도, 중국, 그리스 등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문명의 도덕적 가르침을 비교해 보면 그 궤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비겁함이나,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이를 배신하는 행위를 칭송한 사회는 인류 역사상 단 한 곳도 없었다. 즉, 도덕은 인간이 편의에 따라 임의로 발명해 낸 제도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척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연법이 지닌 가장 역설적인 특징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점이다. 중력 같은 자연 법칙은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규정하므로 돌멩이나 나무는 이를 결코 거스를 수 없다. 반면 인간 본성의 법칙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오직 인간만이 이 법칙의 존재를 명확히 알면서도,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스스로 어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루이스는 인간이 매 순간 이 도덕률을 어기며 살아가면서도, 정작 누군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하면 즉각적으로 이 법칙을 들이밀며 분노하고 항의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아가 루이스는 자연법이 단순한 생존 본능이나 사회적 학습의 산물이라는 반론을 엄격하게 차단한다. 먼저 본능과의 차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았을 때, 우리 안에는 '위험하니 도망치고 싶은 본능'과 '뛰어들어 돕고 싶은 본능'이 동시에 충돌한다. 이때 두 본능 중 상대적으로 약한 쪽인 '돕고 싶은 본능'의 손을 들어주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촉구하는 제3의 목소리가 바로 자연법이다. 또한 자연법은 사회적 관습과도 다르다. 만약 도덕이 단순한 시대적 관습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과거의 노예제나 나치의 대학살을 향해 '틀렸다'고 단죄할 자격이 없다. 우리가 과거보다 현재의 도덕 수준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시대를 초월하여 두 사회 모두를 객관적으로 저울질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루이스는 이 자연법을 통해 신의 존재를 훌륭하게 논증해 낸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 너머에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며,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이 준엄한 도덕의 법칙을 새겨놓고 끊임없이 선을 촉구하는 초월적인 입법자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삼위일체라는 신비가 어떻게 인간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지 논리를 확장해 나간다. 그가 제시하는 수많은 통찰 중에는 여전히 지성으로 소화하기 버거운 것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며 단숨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있다. 그 가운데 내 마음을 가장 강렬하게 타격한 것 은 바로 '사랑과 용서'에 관한 장이었다.
루이스는 사랑을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한다. 첫째는 '감정'으로서의 사랑이고, 둘째는 '의지와 연합'으로서의 사랑이다. 그는 누군가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을 삶과 관계의 궁극적인 토대로 삼을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감정이란 본질적으로 변덕스러우며 영원히 끓어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축적될 수 있고 습관은 몸에 각인될 수 있지만, 감정은 결코 영구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벅찬 감정 상태로만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일상적인 삶 자체를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루이스는 의도적인 습관과 견고한 의지로 유지되는 두 번째 사랑이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낭만적인 느낌이 모두 증발해 버린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기꺼이 상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진짜 사랑이다. 감정적인 사랑은 거대한 엔진을 돌리기 위한 시동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사랑의 본질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난해한 덕목인 용서와도 직결된다. 교회 문턱을 밟아보지 않은 사람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은 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원수마저도 억지로 껴안고 애틋한 감정을 품어야 한다는 가혹한 명령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루이스의 해석은 다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우리 자신을 대단히 예뻐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못난 점을 혐오하고, 비겁한 속마음에 환멸을 느낄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밉든 곱든 '나'이기 때문이다.
즉,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억지스러운 호감을 꾸며내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의 단점과 끔찍함을 알면서도 여전히 나의 안녕과 구원을 바라는 것처럼, 나를 분노하게 만든 상대에게도 애써 다정한 감정을 짜낼 필요 없이 그저 '그의 영혼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의지'를 갖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용서와 사랑을 시작한 것이다. 사랑할 구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감정의 동요 없이 의지만으로 선의를 베푸는 것, 그것이 루이스가 말하는 기독교적 사랑의 정수다.
글의 서두에서 고백했듯, 나는 오랫동안 내 안에서 선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모순 때문에 깊이 좌절하고 냉소했다. 나의 절망은 '스스로의 힘으로 완벽하게 선한 감정과 행동을 짜내야 한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순전한 기독교』를 덮으며 나는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되었다. 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결점의 도덕적 성취나 뜨거운 감정의 유지가 아니었다. 내 안의 얄팍한 본능이 끊임없이 이기심을 향해 기울 때조차, 절대자가 심어놓은 도덕률의 목소리에 순복하여 타인의 안녕을 바라기로 의지적으로 결단하는 것. 바로 그 건조하지만 묵직한 한 걸음이 나를 작은 예수의 길로 이끄는 시작점임을 깨달았다. 온전히 선해질 수 없다는 절망은 이제 끝났다. 감정이 식어버린 자리에서도 나의 의지는 계속해서 사랑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