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학교, 따뜻한 마을

강삼영의 글쓰기

by 강삼영

친절한 학교, 따뜻한 마을


의무교육은 많은 사람이 차별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환경을 이끌었지만, 학력의 격차를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늘 ‘교육이 희망’이라 말했다. 더구나 의무교육 확대와 무상교육에 힘쓰면서, 공교육을 불평등에 맞서는 방파제라 자부해 왔다. 물론, 많은 성과가 있었다. 2010년부터 교육감 직선제를 거치면서 중학교는 의무교육과 무상교육이 같이 이루어졌고 고등학교 교육도 전면 무상교육으로 바뀌었다. 이제 공교육이라는 제도의 틀 안에서만큼은 고등학교 졸업까지 돈 한 푼 들지 않는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까지 돈 한 푼 들지 않는다’ 이 말에 동의하는 부모들은 없다. 산업화 시대 우리 부모들은 가난해 모든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1990년대 고등학교 졸업생 가운데 30%만이 대학에 진학했지만 지금은 70%가 대학에 간다. 부모의 경제력이 충분하지 않아도 대학교육까지 받을 수 있는 장학금 제도도 있지만 국민 대다수는 자녀교육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한다.

이제 공교육은 그냥 아무런 애씀이 없어도 누릴 수 있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환경이다. 자녀가 많으면야 걱정 없이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세상이니 그것만큼 좋은 게 없겠지만, 두 집 건너 아이가 하나인 시대인데,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교육으로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만을 위한 교육을 찾아 나선다. 그것이 국제학교이든 대안교육이든 영어유치원이든 무언가 특별한 것을 주고 싶다. 또 한편으로는 학교 공부 끝나고도 부모 퇴근시간까지 딱 맞는 시간표를 만들어 내야 한다. 책 읽기도, 줄넘기도, 공놀이도 사교육에 의존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공교육에 들어가는 지출은 없지만 더 많은 돈을 사교육에 써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누구나 쉽게 누릴 수 있는 건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오늘날 학교 교육이 딱 그런 모양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자녀가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 사교육 없이도 공부를 잘하면 좋겠는데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는 학교 공부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닌 게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공부를 잘한다’는 말이 시험 점수나 등수로 해석되는 상황에서는 교육학적 이성이 개입할 틈이 없다. 공교육을 신뢰하지 못해 사교육의 힘을 빌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면엔 공교육이 주장하는 평등한 교육기회의 보장이 경쟁에서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2022년 합계 출산율은 0.78명이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았는데, 자녀 하나만 혼인을 하고 결혼한 자녀도 아이를 하나만 둔다. 부모만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삼촌, 고모까지 아이 하나만 쳐다보는 관계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던 시대가 아니다. 3대에 걸쳐 아이가 하나뿐인 가족관계에서 '편애한다' 또는 '공평하게 대한다'는 말조차 필요 없어졌다.

지난해 24만 명이 태어났고 이 중에 80%가 대학을 간다면 19만 명쯤 되는데 이 숫자는 현재 서울에 있는 대학의 모집 정원과 비슷하다. 수치로만 본다면 20년 뒤 대학입시 경쟁은 사라져야 마땅할 텐데 더 비관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뭘까. 세계 최고의 저출산과 맞물리면서 누구나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는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표는 창의성 개발과 인간성 실현이지만, 학부모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더 많은 급여와 더 안정된 직업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동안 혁신 또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해왔던 일들은 이 틈을 좁히기 위한 것이었지만,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몸집을 키워가고 있는 사교육 시장을 볼 때,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이 든다.


2021년 KBS 시사기획 창, 한국리서치가 공동기획한 <계급이 돌아왔다 - 이대남 현상이라는 착시> 기사의 내용을 보면 이런 불안감을 통계로 확인해 준다. 총 2,000명을 응답한 웹조사 결과에서 하위 계층을 구성하는 청년들은 상위 계층의 청년에 비해 고등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마치는 비율이 3.7배 높았다. 반면 ‘인서울’에 진학하는 비율은 상층 청년이 2.7배 높았다. 상층 청년들은 73%가 “내 미래가 기대된다”라고 답했지만, 하층 청년들은 42%만이 “기대된다”라고 답했다. 청소년기 공부환경이 좋았던 상층 청년은 대학 진학률도 높고, 미래를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삶의 만족도도 높았지만 하층 청년은 그 반대였다. 상층 청년의 94%는 “부모님이 내 삶에 도움이 되었다”라고 답하고, 하층은 41%만 그렇다고 응답했다. 온전히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기사를 기획한 기자의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은 옛날 얘기다. 따뜻한 가족을 얻는 데도 돈이 든다. 우리는 가족의 화목이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정반대다. 그 어떤 차이보다도, ‘따뜻한 가족’의 계층 격차가 가장 크다”


계층의 격차가 소득과 교육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불평등에 맞서는 방파제로서 공교육과 사회적 돌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교육과정 안에서뿐만 아니라 평생교육의 관점에서 힘든 아이들 손을 꼭 잡아야 한다. 우리가 ‘따뜻한 가족’이 되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 한 명 한 명 자신의 수준과 기질에 맞게 배움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친절한 학교’, 좋은 이웃이 함께 아이를 돌보는 ‘따뜻한 마을’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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