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년퇴직 후 제2의 생에 들어섰다
마흔 해에 몇 해를 더해 내 일터 생활이 마감되었다. 남들보다 이른 국민학교 입학으로 일터 생활이 길어졌다.
지난해 겨울이었다. 그러니까 퇴직 두세 달 전이었을까. 일터 전체 회의에서 수장이 내 정년 퇴임식 문제를 거론하던 날이었다. 옆에 앉아있던 한 후배가 내게 말했다.
"선생님, 혹 뉴스 타는 것 아닙니까?"
"무슨~"
"선생님처럼 긴 해를 일한 사람이 요즈음 있을까요? 어쩌면 역사상 최고로 긴 날을 일터에서 사신 것 아닌지요?"
"걱정 마세요. 옛날에는 나이 열댓부터 이 일터 일을 시작해서 평생을 사신 분들도 있을 걸요? 예전에는 그랬대요. 우리 아버지가 이 일터를 제게 고집하시면서 늘 말씀하셨거든요."
현실 자각 시각이라고 거친 숨결을 내뿜으면서 내 심장에 꽂히지는 않았다. 마음 편안한 가운데 답했다.
서너 해 전 내게 직선으로 던져왔던 일터 젊은 동료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배님, 주식 공부라도 해서 좀 돈을 모으시지 지금껏 일하고 계시네요."
단 한 번도 명예퇴직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생활이었기에 그 또한 부드러운 웃음으로 맞받았다. 한 문장을 건넸을 뿐이었다.
"어, 내 재산 규모를 알아요?"
내 성격 때문이리라. 늘 '그러려니~'하고 사는 삶에 길들여진 삶. 그래야만 했다.
일터 수장이나 부수장과 관련된 일을 치러야 할 때도 그랬다. 어느 일터인들 윗선과 관련되지 않은 일이 있겠냐만 내 일터는 내가 책임져야 할 덩어리가 별도로 가닥지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안고 살던 내 덩어리 외 전체적인 업무를 말한다.
"저, 그것 있지요. 어떻게 돼 갑니까? 그 일은 이렇게 저렇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 텐데요."
수장과 부수장 기타 임원진들은 그랬다. 자기네들끼리의 모임에서 수장의 의견에 일렬종대로 마음 다짐한 것을 '기타'의 분야에서 숨 쉬는 일꾼들에게 전달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수장이 내게 맡긴 일은 이렇게 저렇게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방향에 맞춰 열심히 기획안을 짰다. 다른 '기타' 분야의 일꾼들에게 알렸다. 그렇게 이미 일을 진행하고 있던 참이었다.
꼭 그때가 되면, 훅 불거진 마음 누그러뜨려 수장 마음에 맞게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느껴질 즈음 수장이 불러 확인하는 것이었다. 자기 생각대로 틀림없이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당연한 것을 물어 일부러 확인하는 수장의 문제 해결 진행 방식에 이미 이골이 나 있는 나는 오래 전에 획득한 나만의 응답 방식으로 답했다. 그와 정식 대면식에서 만나는 자리가 만들어질 때 당할 산만함이 귀찮았다. 나는 딱 한 만디만 말했다.
"예."
"그래, 어떻게 하고 있다는 거요? 구체적으로 말을 좀 해요."
"(원하시는 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 마세요. 잘하고 있어요."
일터 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사고방식이자 생활 패턴이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여 나는 늘 역사적 삶을 살았던 셈이다.
눈을 떴다. 나의 일터는 일반 회사와 달랐다. 전체 회의 방식의 정년 퇴임식을 하고서도 바로 다음 날이 정식 퇴직일이 아니었다. 친목행사와 일터 운용 방식의 마지막 모임 이후 한 달 여 기간이 지나야 정식 퇴직이었다. 동안 나는 일터 회원 신분을 정숙하게 지켜내면서 나의 생활을 조용하게 살아내야 했다. 별 고급스러움이 병행되지 않는 이중생활을 하는 셈이었다.
어쨌든 퇴임식 다음날 아침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아침을 맞았다. 어제 아침처럼, 그제 아침처럼. 지나온 여느 나날과 똑같은 날의 아침이었다. 아무런 독특함도 없었다.
"쉬는 날이니 오늘은 영화를 두 편 볼 수 있겠다."
"블로그 글은 꼭 오전 중에 끝내야지."
"어서 시립도서관에서 대여해 온 책을 읽어야지."
"남자가 도서 반납일이 내일이라는 톡이 왔다면서 나를 윽박지르기 전에 다 읽었다며 의기양양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자."
"그래, 일 년 삼백육십오일 중 가타부타 제외하면 약 삼백육십일을 집에서 보낼 예정이다. 실내 운동은 거르지 말자."
"커피는 하루 두 잔만 마시자. 아침 커피는 당분 없이, 점심 커피는 싸구려 국산 잡꿀이라도 괜찮으니 꿀 한 스푼을 더해서 마시자."
"참, 이상한 하루, 즉 폭식이나 가당류 섭취일, 진하게 음주를 행한 날이거나 뜻하지 않게 늦은 저녁 음식 섭취를 해야 했던 날 등의 다음날 아침에는 꼭 혈압계를 작동시키자. 하여 혈압은 130과 90 이상이 나오지 않게 하자."
대부분 평소 하던 일이었다. 결국 나는 일터 생활 마감한 후에도 일터 생활을 하던 때와 비슷한 패턴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달라지는 것은 훨훨 내멋대로 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일터 생활을 하던 때 일터에서 보낸 시간이 유독 길었던 나를 돌아보면 일터 생활 시간을 열 시간이라 치자. 열 시간이 내 자유 시간에 더해지는 셈이었다. 그것만이 내 퇴직 후 생활의 특이점이겠다. 세상에나! 열 시간의 자유 시간이라니, 얼마나 큰 변화냐. 그것이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출근 시와 비슷한 생활이라고? 이런~
눈을 떴다. 정년퇴직식 다음날의 아침을 말한다. 전과 똑같은 기분의 아침이었다. 단지 기상 시각이 지체되었다는 것뿐! 허전함이니 허망함이니, 세상이 텅 빈 것 같다느니 등 주변에서 나보다 일찍 퇴직한 선후배나 친구들이 던져주던 걱정들일랑 나와는 먼 거리의 것이었다. 탈탈 이불을 털어 개어놓았다. 아무렇게나 비뚤어진 채 바닥을 박박 기고 있는 베갯머리를 정리해 각을 맞춰 놓았다. 만년 청춘처럼 몸을 세웠다. 참았던 소변을 좔좔 변기에 퍼냈다. 밤새 불면과 시름하느라 깡그리 에너지를 소모해버린 공복의 얇을 뱃살을 다독여줬다. 체중계에 서니 몸무게는 그냥저냥 평소 통계표와 수평 가까운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서너 달의 시간이 지났던 어느 시점에서 나는 이런 시 같은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시계
뻐꾸기와
혀를 오려버린 커피와
시간을 묻어버린 벽지가
그녀를 맞고 있었다
벽을 마주하고 선 첫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