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의 계약`이 때로는 필요한 이유
오디세우스가 지나는 시칠리아 섬 근처에는 세이렌이라는 바다의 요정이 살고 있었다.
세이렌은 사람의 얼굴과 새의 몸을 가진 바다의 요정이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매혹시키고 그렇게 홀린 뱃사람들이 넋 놓고 있는 중에
배를 난파시킨다고 한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으나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의 귀를 모두 밀랍으로 막게 하고 자신의 몸을 돛대에 꽁꽁 묶게 했다.
그러고는 선원들에게 자신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돛대에 묶인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풀어달라고 선원들을 구슬리고 협박하기도 했지만
선원들은 그를 끝내 풀어주지 않았고 그리하여 일행은 무사히 시칠리아 섬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 행동 뒤에 숨은 심리학 -이영직 지음, Sb출판-
오디세우스가 바로 율리시스이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돛대에 묶어 꼼짝 못 하게 하여 위험을 피하는 것을
`율리시스의 계약`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율리시스의 계약은
스스로 자신을 구속하기 위해 계약하는 것
[출처] 행동 뒤에 숨은 심리학 -이영직 지음, Sb출판-
을 말한다.
듀크 대학 경제심리학자 `댄 애리얼리`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하였다.
댄 애리얼리는
1967년 태생의 미국 듀크대에서
심리학과 행동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출처] 위키백과 -댄 애리얼리-
학기 말 과제물로 세 개의 리포트를 주면서
A 클래스에게는 세 개의 리포트를 언제까지 제출하라고 마감 날짜를 못 박았고
B 클래스에게는 언제 내든 상관없이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만 제출하라고 했다.
결과는 A 클래스의 리포트 성적이 B 클래스 보다 훨씬 높았다고 한다.
그 후 C 클래스에게 세 개의 리포트를 주면서 리포트를 제출하는 날짜를 스스로 정해서 하라고 했다.
대신 자신이 정한 마감 날짜를 어기면 감점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학생들이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면 제출 날짜를 최대한 뒤로 미룰 것이지만
학생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학기를 대략 3등분 한 다음 1/3이 지날 때마다 리포트 한 개씩을 내겠다고
스스로 정했다.
결과는 A 클래스보다는 조금 성적이 떨어졌지만 B 클래스보다는 훨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출처] 행동 뒤에 숨은 심리학 -이영직 지음, Sb출판-
이 실험은
약간의 구속이 `나`를 담금질하여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리히 프롬`이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에게 복종함으로써
고독과 무력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고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과정에서 나타나게 될 불상사를 막으려고 자신을 구속한 것처럼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나`를 구속하여
그 목표를 향한 과정 속에 던져야 한다.
이 구속이 `나`에 의한 스스로의 구속이 아니라 `타인`에 의한 구속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에 의한 구속을 통해
`나`를 그 `타인`의 규율에 복종시킴으로써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달성한 이후부터는 `스스로`에 의한 구속을 통해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처음부터 `스스로`에 의한 구속으로 이루어낸 자는 성인聖人일 것이다.
그런데
상위 0.1%에 해당하는 사람 중에는 `스스로`에 의한 구속을 통해 이루어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타인`에 의한 구속이든, `규율`에 의한 구속이든, `스스로`에 의한 구속이든
이러한 구속에 복종함으로써 사람들이 고독과 무력감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이러한 구속 중에서 어느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를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떠한 구속도 선택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의 구속을 선택하는 것은 `구속으로의 자유`이고
어떠한 구속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우리의 삶의 여정이 오디세우스처럼 온갖 풍파와 유혹을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풍파와 유혹을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속에서 과연 헤쳐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닥쳐온 모진 풍파와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구속으로의 자유`가 있을 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자유`가 있고 없고를 논하는 것은 자칫 언어의 한계로 인해
다람쥐 쳇바퀴를 돌듯 결론 없이 시간만 낭비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나`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에 `나`를 옥죄는 그 무엇을 `구속`이라고 한다면
그 `구속`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나`를 위한 길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지금 내게 닥친 `구속을 통해서 자유`를 찾을 것이냐
아니면 그 `구속을 벗어나서 자유`를 찾을 것이냐에 답하는 것이
내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어떤 자유를 택하든 무언가 이루고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스스로에 의한 구속`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