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의사소통 VS 미디어에 의한 소통]

AI 가 `신`이 되어 버린 이유

노르베르트 볼츠는

1953년 태생으로 현역인 독일의 철학자이다.

미디어 이론을 연구하며, 현재 베를린 공과대학교 교수이다.

독일 미디어 이론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저서로 저서로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 <세계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ABC>,

<놀이하는 인간>, <미디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구글 이미지 -노르베르트 볼츠-

노르베르트 볼츠는

1993년 자신의 저서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에서

`의사소통 행위`를 주장하는 하버마스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당시 하버마스는 독일 언론계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서

그를 비판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볼츠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은

`힘을 행사하게 하지 않고 논의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의사소통이라는 이상`은

탈주술화된 근대에서 `종교`와 같은 것이다.


라며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은

절대화되어 진리의 체현자처럼 행동하지만 오히려 `신화`라 불리는 편이 적당하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고 비판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은 너무 이상적이고 이론적이라는 말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을 좀 더 살펴보면


개선된 사회란 개방적이고도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이며,

이는 달리 말해서 열린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회라고 말하면서


대화란 단순히 사적인 영역이 아닌 공적인 영역이며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기초라고 주장한다.

현실 사회에서 대화는 얼마든지 왜곡되고 비이성적인 형태로 발생할 수 있지만,

그러한 왜곡과 비이성은 인위적인 산물이다.


비록 현실에서 이러한 왜곡이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대화는 이러한 왜곡과 비이성이 제거된 이상적인 대화 상태를 준거점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이상적인 대화의 모델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화용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출처] 시대와 철학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철학자의 서재] 박영옥 숙명여대 교수-


이에 대해 볼츠가 비판하기를

하버마스의 이러한 주장은

이상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며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말하며

하버마스가 말하는 `이상적인 대화 상태`가 애초에 잘못된 설계라고 주장한다.


대화에 참여하는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서

일치에 도달한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로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또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족이나 배우자에게서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벽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을 서로 주고받으며 소통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고
상대방도 자기가 이해한 방식대로 이해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출처] 시대와 철학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철학자의 서재] 박영옥 숙명여대 교수-


그러므로

볼츠가 보기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을 통한 해결은 어디까지나 믿음일 뿐이며
이상적인 대화 상황이란 이러한 믿음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출처] 시대와 철학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철학자의 서재] 박영옥 숙명여대 교수-


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볼츠는 `루만`의 `사회시스템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미디어론`을 주장한다.


루만의 `사회시스템 이론`은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ys`라는 `자기 생산` 과정을 통해 사회가 유지되는데
인간 중심의 소통이 아닌 체계와 체계가 주고받는 소통이 중심이다는 이론이다.

[출처] [칼럼] [인간의 존재 VS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하버마스도
근대 사회의 구조적 특징이 바로 인간 개개인의 의사소통이라는 `생활 세계`로부터
`체계`가 분리된 것이라며 `체계`를 말하고 있는데


하버마스가 말하는 체계는 인간 중심에서 `체계`가 탄생한 것이고
루만이 말하는 체계는 인간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체계`가 탄생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출생연도를 살펴보면 하버마스는 1929년 생이고

루만은 1927년 생으로 서로 간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볼츠는 이러한 `의사소통론`에서 `미디어론`으로 전환을 하게 되는데


1990년대의 컴퓨터와 통신 기술에 주목하면서

근대의 특징이 종이의 발명으로 인한 인쇄문화인 것처럼

앞으로의 시기는 컴퓨터에 의한 통신이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만큼 통신 기술인 인터넷은 강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메시지는 지금의 흐름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지금의 강자가 영원한 강자가 될 수가 없고

약자도 강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과 집단 간의 의사소통이 확장되어

국가와 같은 시스템 곧 체계가 형성되어진 상황에서

의사소통을 위한 `토의`가 완벽한 대안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토의`라는 과정이 없다면

개인과 집단 그리고 국가를 조정하면서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현대는 미디어에 의한 소통까지 등장하여

더욱더 얽혀 버린 미로의 세상이 된 것이다.


결국 `볼츠`도 미디어에 의한 여러 문제점만을 지적할 뿐

그저 미디어를 통한 통제와 왜곡을 돌아보고

의심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원리원칙적인 점을 나열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제시한 대안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도 뚜렷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한 현안에 대해서 지적하고 문제점을 들추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는 온통 지적뿐이다.

대안은 없고 문제점만 나열할 뿐이다.


`키틀러`가 말한 기술미디어론에서도


기술에 의한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면서

정작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할 뿐이다.


아마 인간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절벽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험을 알지만서도 어쩔 수 없는 지금 당장 살기 위한 앞으로 나아감이다.


중세는 종교와 주술의 힘이 지배했고
근대는 이성의 힘이 지배했고
지금 현대는 이성에 의해 탄생한 미디어들의 힘이 지배하게 되었다.

미디어 특히 AI 에 의한 인간 잠식은 이제 막 시작하고 있다.


이제 인간들이 한 말보다 AI 의 말을 더 신뢰할 것이고
인간들끼리의 의사소통은 AI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되고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누군가 무슨 말을 해도

비판적으로 수용해 왔지만

앞으로는 그 비판마저 없이 무분별하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제 AI 가 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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