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다양한 관점 VS 하나의 관점]

`하나의 관점`을 `하나의 화폭`에 담아야 하는 이유

움베르토 보초니는

1882년 태생의 이탈리아의 조각가이자 화가로 `미래파`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작품으로 <공간 속에서 연속되는 특이한 형태>, <도시는 일어서다>,

<자전거 타는 사람의 역동성>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움베르토 보초니-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805%EF%BC%BF235259%EF%BC%BFGoogle.jpg?type=w966 구글 이미지 -움베르토 보초니-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를 이어 미래파(미래주의)가 등장하였다.


미래파 또는 미래주의는


과거의 전통을 부정하고
근대 문명이 낳은 속도와 기계를 찬미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출처] 위키백과 -미래파-


있다고 한다.


이러한 미래파는


산업혁명 이후 발달해 가는 기술 문명에 고무되어
미래파 예술가들은
인류의 앞으로의 미래가 대단히 영광되고 흥분될만한 것이라고 낙관했다.

[출처] 위키백과 -미래파-


고 한다.


그리고 이런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새로운 세계의 미는

현대 문명을 창조해 가는 '기계의 미'라고 판단하여


기계와 관련된 '속도'를 찬양하며
'속도'가 가져오는 소음, 힘, 운동, 충돌, 모험,
그리고 젊음 등 다이나미즘을 지향하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다.

[출처] 위키백과 -미래파-


고 한다.


이렇게 미래파 화가들은 속도와 운동 그 자체를

하나의 화폭에 그리고자 하였는데

이는 서양 미술 사상 유례가 없는 획기적인 시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미래파는


시점을 고정시키지 않고
다 시점, 복수 시점에 의해
대상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묘사하려고 하였고

사물의 잔상에 주의하면서
보고 있는 것과 기억하고 있는 것을 종합하여 표현했다.

[출처] 위키백과 -미래파-


고 한다.


피카소와 같은 입체파가 다양한 시점을 하나의 화폭에 표현하려고 한 것처럼

미래파는 '움직이는 순간'까지도 표현한 것이다.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806%EF%BC%BF005738%EF%BC%BFGoogle.jpg?type=w966 구글 이미지 -움베르토 보초니, 공간 속에서 연속되는 특이한 형태-


위 작품은 보초니의 작품으로 제목이 특이하다.


<공간 속에서 연속되는 특이한 형태>이다.
영어로는 <Unique Form of Continuity in Space>이다


작품에서 어딘가 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엿보인다.


모자 쓴 한 남자가 어딘가로 바삐 가고 있다.
바람을 가르며 길을 재촉하는 모습에서 휙휙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출처] 세계일보 2022 4.15.-박일호의 미술여행] 공간 예술에 시간의 흐름을 담다-


고 느낌을 말하고 있다.


인상파가 보이는 대로 표현했다면
야수파는 보이는 것을 단순화하여 보색 대비의 색채로 강렬하게 표현한 것이고
입체파는 `다 시점`을 한 화면에 표현하여 시선의 왜곡을 추구했고
미래파는 여기에 덧붙여 움직임과 속도감까지 표현한 것이다.


다음은 보초니의 작품 중 <도시가 일어나다>라는 작품이다.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806%EF%BC%BF004456%EF%BC%BFChrome.jpg?type=w966 구글 이미지 -움베르토 보초니, 도시가 일어나다-


도시 건설로 부산하게 들떠 있는
라노의 활기찬 느낌을 나타냈다.

[출처] 세계일보 2019.3.22. -[박일호의 미술여행] 역동의 미래주의-



고 평하고 있다.


윗부분의 건물이 세워지고 있는 광경은
색 선의 분할주의 방식을 사용해서 나타냈고

가운데 부분에는 근육질의 흰색 붉은색 말들이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꿈틀거리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가운데 짙게 푸른 소용돌이가 아주 빠르게 뒤섞이고
겹쳐 흐르는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도시의 활력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아랫부분에는 그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손을 뻗치기도 하고 따라가기도 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새로운 도시의 활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라는
소재를 결합해서 활기참과 역동성으로 가득한 도시의 미래를 표현한 작품이다.

[출처] 세계일보 2019.3.22. -[박일호의 미술여행] 역동의 미래주의-


뭔가 복잡하게 얽혀있고

어떤 의미를 모두 표현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시선과 다양한 의미를 하나의 화폭에 담으려고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속도감을 나타내는 것까지는 괜찮아 보인다.


위의 작품 <공간 속에서 연속되는 특이한 형태>은

하나의 관점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확연히 눈에 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관점을 하나의 화폭에 담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시점을 하나의 면에 나타낸다는 것은

글쓰기로 말하면 단편소설일 것이고


다양한 시점에 다원주의 격인 관점과 어떤 움직임, 속도감, 시간을 넘나드는 초월감을

나타내면 장편소설일 것이다.


하나의 관점을 표현하든지 다양한 관점을 표현하든지
단편소설이든 장편소설이든 수많은 면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하나의 화폭에 다양한 관점을 담는다는 것은
`한 단어`로 모든 사상과 감정과 삶, 죽음을 나타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차라리 표현하고자 하는 순서에 따라

작품을 여러 개로 분산하여 나열하면 의미 전달의 측면에서는 더 확실할 것이다.


물론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모호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일부러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다양한 관점을 하나의 화폭에 담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일 글을 쓰는데 다양한 관점이 무분별하게 섞여 있다면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글이라면 아마 글을 읽다가 던져버릴 것이다.


책장에 있는 여러 책들은 모두 다양한 관점을 품고 있다.


만일


박경리 소설 <토지> 10권을 책장 한 칸에 모두 넣지 않고 여기저기에 흩어 놓는다면
박경리 소설 <토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keyword
이전 03화[칼럼] [입체파 VS 인상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