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가을, 제주도 올레 10코스를 걷고 난 뒤 매일 저녁 제주도 부동산을 검색했다. 제주도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것이다. 직장생활로 인생의 대부분을 소진하고 결국 회사로부터 버려지는 부품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제주도에 내려가 정착하면서 고생하고 실패하더라도 '나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당시 제주도 올레길 걷기 붐이 생기면서 제주도의 땅값이 들썩이고 부동산 가격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여유자금과 은행 대출로 구입할 땅과 집이 있을지 걱정됐다. 여러 날 인터넷 부동산에 올라온 집들을 살펴봤지만 더 이상 새로운 매물은 올라오지 않았고, 집들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이렇게 하는 건 시간낭비였다. 더 과감하고 적극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안 되겠어. 우리 휴가 내고 한 번 더 제주도에 내려가자. 직접 돌아다니면서 집을 알아봐야겠어.”
내 의견에 세희도 공감했다. 세희는 내가 어떤 의견을 내거나 결정을 할 때 크게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공감해 주고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사실 세희는 나보다 먼저 제주도에서 살고 싶어 했다.
제주도에서 살 집을 구한다면 어느 지역 어떤 동네의 어떤 집을 구해야 할까? 우리 형편상 선택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조건을 생각해야 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름의 조건을 마음속으로 몇 가지 정리해 보았다.
1. 올레 10코스 주변 서쪽지역 (내가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걸어 본 곳)
2. 아이들 학교가 도보로 등교 가능한 곳 (1 km 이내)
3. 안전한 장소, 치안이 나쁘지 않은 동네. 그러므로 너무 외진 곳은 안된다.
4. 버스정류장 등 교통이 좋은 곳. 공항까지 가는 버스가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
5. 다치거나 아플 때 근처에 병원이 있어 쉽게 갈 수 있어야 한다.
6. 집이나 땅 규모가 여유 있어 주거 외에도 게스트하우스나 민박 같은 먹고살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곳
1.
제주도를 여러 번 가 봤지만 회사에서 여름휴가 때 4~5일 자동차를 렌트해서 관광명소 위주로 다녀온 게 전부였던 나는 제주도 어디에서 살지 전혀 감이 없었고 배경지식도 없었다. 풍경만 좋은 관광명소와 살기(생활하기) 좋은 곳은 전혀 다른 문제이므로.
나보다 제주도를 많이 공부하고 여행코스를 계획했던 세희는 고즈넉한 저지오름 아래의 동네나 대평포구 안쪽으로 들어간 조용하고 예쁜 동네를 먼저 생각했다.(지금 이 두 동네는 더 이상 고즈넉하지 않다.) 나야 어디든 크게 상관없었다. 처음 걸어본 올레 10코스 주변의 동네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2.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큰 아이는 초등생이고 작은 애는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인데 두 아이 모두 경기도 광명에 있는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대안학교가 집에서 멀어 학교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아내는 매일 아침 아파트 입구에 버스가 정차하는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고, 오후에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려 아이들을 데려와야 했다.
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학교를 오갈 수 있는 안전하고 가까운 집을 간절히 원했다. 조금이라도 육아의 노동을 덜 수 있도록.
3~4.
무엇보다 세희에게 중요했다. 세희는 제주도를 좋아했지만 시골은 무서워했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세희는 한 번도 도시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었다. 외진 시골의 주택에서 산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러니 버스정류장도 가깝고 너무 외지거나 밤이 되면 너무 깜깜하지 않고 적당히 번잡하고 방범이 괜찮은 동네 안쪽에 위치한 집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집에서 공항까지 교통이 편리해야 가끔씩 부모님 댁에 가거나 서울에서 일 보기에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제주에 방문한 지인들이 우리를 찾아 방문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5.
그나마 아이들이 초등학교 갈 나이까지 커서 다행이지만 데리고 병원 갈 일이 얼마나 많은가? 독감, 수족구, 중이염, 충치 등등 아이들 키울 때 거의 매주 병원에 데리고 간 것 같다. 제주도 시골동네에 병원이 있을 턱이 없겠지만, 차를 몰아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에 병원이 있으면 다행이다.
6.
마지막 조건은 우리 가족이 제주도에 오랫동안 잘 정착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아무리 제주도가 좋다 해도 먹고 살 생계 대책이 없으면 다 허사가 아닌가? 내가 모아둔 돈이 얼마 안 되고 부모님으로부터 받을 유산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으므로 생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다시 제주도를 떠나 육지로 돌아가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거주하는 공간을 일부 이용해 생계활동을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대략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직장에 연차휴가를 내어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휴가 첫날은 기왕 제주도에 왔으니 숙소를 잡아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하지만 목적을 가지고 제주도에 온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부담이 가득했다. 가족들에겐 겉으로 태연한 척했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공인중개사를 찾아가 매물로 나온 집들을 온 가족이 함께 다니며 구경했다. 하루동안 몇 군데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집이 거의 헛간 수준으로 무너지고 잡풀이 무성한 데도 있었다. 어떤 집은 운동장 만한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일열로 여러 개 붙어 있는 독특한 구조와 그에 비해 아주 조그만 마당을 가지고 있었다. 이층 집으로 지어진 집도 있었는데 우리가 가진 예산으로는 구입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집구경하고 숙소에 돌아오니 마음이 허탈했다.
“이렇게 이상한 집들만 대충 구경하다 끝나겠네. 정말 나한테 적당한 집은 없는 걸까? 제주도까지 와서 이렇게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데…”
마지막 카드가 있기는 했다. 제주교차로신문에서 보았던 매물이었는데 몇 개월간 거래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거나 가짜 매물일 거라 생각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공인중개사에 전화했다.
“여보세요. ○○ 공인중개사지요? 저기... 사계리 쪽에 내놓은 집을 좀 볼 수 있나요?”
“네. 주소 찍어 줄 테니 가서 보고 연락 주세요.”
공인중개사는 무심하고 성의 없는 목소리로 고작 주소만 알려주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흠… 뭐 이리 무심하지? 장사하는 사람이 매물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엄청 달려들어 팔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사는 광명의 공인중개사였으면 당장 약속을 잡고 집을 팔고 싶어서 난리가 났을 텐데...”
제주도는 문화가 다른가보다 생각했다. 별 기대 없이 공인중개사 아저씨가 알려준 집을 찾아갔다. 구름이 가득하고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하늘이 어두웠다.
가운데 마당을 두고 조그만 집 두 채가 마주 보고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흔히 안거리와 밖거리라고 부르는데 안거리에는 부모님이, 밖거리에는 큰아들 부부가 살다가 나중에 큰아들이 안거리로 들어온다고 한다.) 두 건물 사이 마당 한편에는 작은 돌창고가 있었다. 돌창고 건물은 반으로 나뉘어 한편은 창고로 다른 편은 욕실 겸 화장실이었는데 소변기와 양변기가 각각 있었다. 돌창고 바로 옆에는 정화조가 절반정도 노출돼 있었다. 바깥 길에서 보이는 건물(밖거리)은 주거지 겸 미용실을 하고 있었는데 집주인은 아니고 세입자인 것 같았다.
하늘색 슬레이트 지붕의 마당 안쪽 구옥(안거리)은 살림살이가 그대로 있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랜 된 것 같았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마루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오른편에 한두 명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아주 조그만 방 2개, 왼편에 1개가 있었고 맨 끝에 물부엌이 있었다. 화장실이나 욕실은 바깥 돌창고에 붙어 있는 것을 사용한 모양이다. 머리가 닿을 것 같은 낮은 천장과 지붕, 문지방 위에 붙어 있는 부적들, 밑동이 다 썩어가는 나무기둥과 벽지가 뜯겨 나가 드러난 경사진 흙벽, 장판 바닥에 죽어 있는 지네와 바퀴벌레 사체들을 보면서 마음이 심란했다.
“이런 집을 수리해서 살 수 있을까?”
안거리 집을 지나쳐 뒤편으로 가면 곧바로 귤나무밭이 나왔다. 귤나무가 빽빽해서 집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었다. 귤나무 가지들이 서로 빈틈없이 겹쳐져서 나무 밑동의 빈 공간을 따라 몸을 숙이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기다시피 돌아다녔다. 하지만 비가 내려서 구석구석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결국 집 모양과 경계를 보기 위해 대문 밖으로 나와 바깥 돌담을 따라 걸었다.
“돌담이 참 예쁘네!”
땅 모양이 길쭉하고 한 겹으로 쌓은 돌담(홑담)이 엉성하고 덩굴이 무성했지만 왠지 정겨웠다. 집 건물은 잘 모르겠는데 돌담이 그냥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우리 가족이 제주도에서 살아갈 집을 찾은 것일까?'
당시엔 제대로 알아볼 겨를이 없었지만, 집 주변 동네도 나쁘지 않았다. 집에서 몇 십 미터 거리에 버스정류장과 조그만 마트와 편의점이 있었다. 편의점 옆 골목에는 조그만 한의원이 있었다. 하루에 10편 운행하는 공항 급행버스도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다닐 초등학교는 집에서 약 300미터 거리에 있었다. 해변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운이 좋게도 주변 환경과 집터가 내가 필요로 했던 것들과 잘 맞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