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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미 Aug 17. 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희망'은 여전히 미지수다.

이다지도 평범한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꿈꾸고 제 손으로 무너뜨리기까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이 벌어진 이후 황폐해진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생존기를 다룬 영화다. '재난 영화'가 한국 영화 여름 성수기 대전에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시기적으로 흥행이 어렵지 않을까 우려되었으나 개봉 후 완성도 높은 '육각형 영화'라는 호평과 함께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재난 영화이지만 블랙 코미디 요소가 은은하게 퍼져 있어 <잉투기>의 위트와 <가려진 시간>의 뛰어난 미술이 합쳐진 듯한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 <잉투기>와 <가려진 시간>을 통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의 연장선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 '좀비 바이러스 재난 영화'였던 <부산행>의 흥행 이후 최근 몇 년 간 재난 상황 혹은 재난 이후의 상황에서의 인간 군상극을 자주 만나볼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재난'의 소재를 '블록버스터 장르'를 위해 활용하는 것보다는 극한 상황에서 다양한 인간들의 행태를 통해 결국 인간은 어떠한 가치관을 지녀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주류가 되었다. 그렇기에 대개 이런 작품들에서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나와 갈등을 하고, 사람들의 타협을 방해하는 제3의 요소 (계속되는 바이러스나 자연재해, 살인자의 존재, 정치 사회적인 문제 등)가 존재했다. 개인주의(라고 하기엔 이기주의에 가까운)가 확대되고 마음의 여유가 점점 없어지는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 인해 점점 이런 작품들에서 환상에 가까운 '선한 인물'은 작가의 의도와 달리 어느 순간 '고구마 답답이' 혹은 ''빌런'으로 평가를 받는 안타까운 현상을 마주하기도 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역시 재난 이후의 극한 상황에서 다양한 인간들의 외적 혹은 내적갈등을 통해 관객들에게 '유토피아'를 위해선 결국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하지만, 기존의 유사한 소재의 작품과는 궤를 전혀 달리 하기에 사뭇 신선하다. 일단 사람들을 극한 상황으로 계속해서 내몰기 위한 제3의 환경적 요소가 없다. '대지진'이라는 재난은 영화 초반부에 아주 짧고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중간에 지진이 몇 번 더 일어나지만 초반부처럼 세상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기에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생활에 다시금 방해가 되진 않는다. 

또한, 가장 핵심적인 차별점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부재다. 그중에서 가장 절대 선에 가까운 '명화'(박보영)마저 주민 수칙에 일단은 순응하며 재난 상황에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남편 '민성'(박서준)을 지키기 위해 아픈 902호 할머니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추궁하고, '영탁'(이병헌)의 실체를 밝힐 때는 불만을 가지고 있던 황궁 아파트 주민 수칙을 적극 인용한다. 즉, 영화 내에서 선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명화까지도 완벽한 선이 아니고 입체성을 띤다. 

반대로 절대 악 역시 없는데,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외부인을 내쫓기로 결정하는 장면은 안타깝지만 이것이 악한 행동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특히나 그들이 부유층이 모여 살던 드림팰리스 주민들로부터 차별을 받았다는 과거를 생각하면 미안하긴 하지만 일종의 복수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고소하기도 하다. 전세 사기를 당했던 영탁이나 무리해서 자가를 마련한 신혼부부 민성과 명화 등 주요 인물들의 설정은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아파트를 향한 집착과 살아남기 위한 다소 무리한 선택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가 가지는 의미,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의 근원을 요약하는 영화 첫 시퀀스는 이 세계관의 이해를 돕는다. 명화와 제일 대척점에 있어 절대 악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영탁이 다들 어쩔 줄 몰라하던 화재 상황에서 용기 내 불에 뛰어들었던 첫 등장을 생각하면 그가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마저도 계산된 행동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영탁 내면의 선함을 보여주는 장면인듯 하다.) 쓰러져 있는 외부인들을 지나칠 때 연민을 느끼고, 예기치 못한 사고에 죄책감을 느끼는 민성이 무기를 들었다고 해서 악의 편에 섰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입주민 대표를 뽑고, 주민 수칙을 마련하고 작은 사회를 구성하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희망적이다. 그토록 꿈꾸던 자신의 아파트, 자신의 공간에서 유토피아를 구축하고자 하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과정에서 성스러운 음악도 흘러나오고 주민들은 밝게 웃으며 하트를 그려 보인다. 그렇기에 결말이 정반대일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고, 당연히 그 결말은 유토피아의 몰락이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없고, 또 다른 재난과 주민들을 방해하는 제3의 요소도 없으나 모든 것이 무너진다. 한정된 재화는 재난 상황에서 당연한 것이고, 외부의 침입 역시 악의 세력이 아니다. 결국 파국의 원인은 유토피아를 만들었던 황궁 아파트 주민들,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수라장이 되어 모두가 뒤섞여 싸울 때 누가 황궁 아파트 주민이고 외부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 세계관에서 절대 선과 절대 악의 경계와 이 모든 파국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 짓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신보다 부족한 타인을 함부로 무시했던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살기 위해, 혹은 반대로 다수를 살리기 위해 악을 이용해야 했던 사람들이 다 함께 자초한 결과다. 지극히 이다지도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모여서 아이러니하게 디스토피아를 만들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꿈꿨던 유토피아를 그 평범한 사람들이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잔혹사다. 절대적으로 잘못한 자가 없다는 점에서 실로 안타깝다. 영탁이기도, 민성이기도, 명화이기도 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정말로 닿을 수 없는 것인가 허망하다. 그러나,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맞서 싸우기보다는 싸움이 멈추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명화만이 홀로 살아남아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고 따뜻한 밥 한 주먹을 건네준 집단에 들어가는 결말을 통해 엄태화 감독은 평범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되,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며 영화를 만든 자로서 최선의 책임도 다한 듯 보인다. 하지만, 같은 주민끼리 똘똘 뭉쳐 사회를 이루고 외부인과 척을 졌던 황궁 아파트 주민들과 달리 결말부의 공동체는 출신이 다른 외부인들끼리 섞였다는 그 차이점을 생각하면, 슬프게도 내게 '유토피아'는 (특히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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