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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 May 30. 2023

오늘도 달려가는 인생의 모든 '스프린터'들에게

그럼에도 달려야 한다면, 어떻게 달릴 것인가요?

영화 <스프린터>는 세 명의 100m 달리기 선수들이 치르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보여준다. 1,2차로 나뉘어서 진행되는 선발전 전체를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고, 챕터를 나누어 선수 각각의 100m 경기를 조명한다. 10초 남짓한 100m 달리기 경기를 알차게 활용한 독특한 구성이다. 영화에 나오는 세 선수는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현수'(박성일), 최고의 자리를 꿈꾸는 '준서'(임지호), 최고의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 압박감을 가진 '정호'(송덕호)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하는 조력자 셋이 등장하는데, '지현'(공민정)은 한때 선수였기에 현수가 운동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지완'(전신환)은 유망주 국가대표였으나 다른 인재들에 밀려 울면서 그만둔 뒤 준서의 학교 체육 교사 정규직 자리를 노리고 있으며, '형욱'(최준혁)은 정호의 자리를 지켜줘야 하는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 

선발전 트랙 위에서 직접 달리는 세 선수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 인물까지 6명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100m 달리기를 대하고 있으나 어딘가 모르게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는 경기 결과는 다르더라도 모두 같은 결승선을 향해 달려간다는 100m 달리기의 특징과도 닮았다. 이처럼 100m 달리기를 닮은 영화 <스프린터>는 6명의 인물 그 어느 누구의 이야기에 더 무게를 두지 않으며, 각각의 캐릭터는 자기의 길을 달려간다. 그러나 달리기는 개인 종목이지만 함께 달리는 종목이며, 앞만 보고 내 경기만 하면 되는 기록경기지만 옆 사람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에는 순위가 매겨지는 스포츠 경기인만큼, 트랙 위에서 다르게 숨 쉬는 캐릭터들이 마주하는 결과는 달라진다. 영화 속 세 선수는 달리기를 잘하고 싶고,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같지만, 개개인의 속도뿐만 아니라 10초 뒤에 도착할 목적지와 선수로서의 어떠한 자리를 위해 준비한 과정이 다르기에 다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때 '결과'는 결승선을 통과하는 절대적인 순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스프린터> 스틸컷
<스프린터> 스틸컷

선수로서 '최고의 자리'를 기준으로 내리막길, 오르막길, 정상의 위치에서 달리고 있는 세 선수들이 처한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한 선수가 모두 겪을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여섯 명의 모든 상황을 한 명이 선수로서 활동하는 동안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스레 물러나야 하는 현수와, 최고의 자리를 꿈꾸지만 코치의 과거가 마치 자신의 미래인 듯한 준서, 그리고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정당하지 못한 수단까지 택하게 된 정호 모두를 응원하게 되는 건, 그들이 쉽게 트랙을 떠날 수 없는 이유와 그 열정만큼은 투명하기 때문이다. 

<스프린터>의 현수
<스프린터>의 준서
<스프린터>의 정호

재능은 있으나 어느 한 문턱에서 포기의 갈래에 서게 되는 선수들이 상당히 많다. 사실상 대부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들 동네에서 이름 한 번 날려본 사람들이 한 데 모여서 경쟁하는 공간은 그야말로 날고 기는 선수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많은 선수들이 '나의 재능은 별 거 아니었구나'를 느끼는 순간이 온다고들 한다. 영화 속 준서의 코치가 운동을 그만두게 된 계기도 이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이것만을 위해 달려온, 특히나 엘리트 스포츠 문화가 자리한 대한민국에서 운동선수를 준비하다 그만둔 학생들이 돌아갈 자리는 그들이 가고자 했던 꿈의 자리만큼이나 비좁다. "어차피 포기하게 될 거다, 아무리 해도 최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하루빨리 다른 길을 알아보라" 하는 소위 말해 '나도 겪어봐서 안다는 어른들'의 회유는 잔인하다. 그들이 운동을 그만두지 못하고 각자의 자리를 지켜보기 위해 어떻게든 애쓰는 마음은 운동을 향한 순수한 열정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생존 싸움에서 비롯된다. 세 선수의 이야기가 어느 한 선수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한 선수가 운동 인생에서 한 번쯤 다 겪어볼 법한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운동이라는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의 결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운동선수의 순수한 열정을 강조하던 기존 스포츠 영화와 사뭇 다르다.

<스프린터>는 선수로서 경기에 임하는 방식과 태도의 '순도'에 관한 영화다.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세 선수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같은 경기를 대하는 선수들의 그 순도의 차이가 결국 각각이 감내해야 할 앞날의 투명도와 비례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 살아남기 위해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혼자서 밤늦게까지 달려보는 선수들과 부정한 경로를 택한 선수의 희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순위에서 비롯되는 앞날의 희비가 아니다. 요컨대 <스프린터>는 어떻게 '자신의 트랙'을 달려가야 하는지에 관한 영화다. 육상 경기가 아니더라도, 스포츠가 아니더라도, 인생의 현수, 준서, 정호와 같은 순간에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과 태도로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영화다. 인생에서 그 순간이 단 10초뿐이더라도, 그 출발선과 결승선에서 감내해야 할 그림자는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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