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누가 잘못한 건가요?
서울독립영화제의 기획으로 제작된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는 6명의 감독들이 각각 한 개의 에피소드를 담당하여, 총 6개의 단편들로 엮어낸 옴니버스 영화이다. 이 단편영화 프로젝트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2명의 대화로 구성되어야 하고, 하루 안에 촬영을 끝내야 한다는 조건 하에 진행되었다. 자연스러운 일상 대화인 듯 하지만 날이 서 있는 영화 속 '말'들은 현대인들의 모순된 태도와 그로 인해 외면당하는 또 다른 약자들의 모습을 제대로 꺼내 보인다. 재치 있는 말들의 향연에 하염없이 웃다가도 각 에피소드들의 말미에는 묘하게 씁쓸해진다. 영화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대지만,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는 듯하기에 앞으로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시리즈를 내심 기대하게 된다.
하청업체 CEO와 대기업 과장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잘 다룰 수 있을까'에 관해 나누는 대화로 영화의 프롤로그이자 첫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대화를 가만히 듣고 보면 하청업체 CEO, 즉, (대기업 과장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묘하게 더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을이 살아남기 위해 갑이 아닌 또 다른 을을, 그리고 병을 쳐야만 하는 현실이 바탕에 깔려있다는 증거다. 프롤로그를 연출한 윤성호 감독이 <말이야 바른 말이지>의 총괄 감독을 맡았던 만큼, 이 첫 번째 에피소드를 통해 <말이야 바른 말이지>가 을의 전쟁과 그로 인한 병의 피해에 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예고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줍니다?]와 마지막 에피소드 [새로운 마음]에서 이러한 을의 전쟁의 민낯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임신한 딸에게 아이를 광주에서 태어나게 할 순 없다고, 자신이 지역차별의 피해자여서 잘 안다고 말하는 아버지는 남녀차별에 피해 본 여성의 이야기에는 애써 귀를 닫는다. 지역차별도 이해한다고 말하고, 남녀차별의 설움을 잘 아는 딸은 '엘사들(LH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이랑은 살 수 없다'며 자연스럽게 또 다른 차별의 주체가 된다. 차별의 피해자가 자신이 우위에 있는 상황에선 또 다른 차별을 답습한다. 남자 상사의 권력으로 인해 여러 피해를 받던 여자 직원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편의를 인정받고 회사를 계속 다니기 위해 다른 워킹맘 직원을 이용한다. 직장 내 여성의 고충을 서로 공감할 수 있을 텐데도, 약자는 살기 위해 또 다른 약자를 짓밟고 끌어내린다.
이 골 때리고 찌질한 을의 전쟁 속에서 무력한 병은 그대로 소외당한다. 자신이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서로 물어뜯는 을의 전쟁은 역으로 병을 외면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 [하리보]와 다섯 번째 에피소드 [손에 손잡고]에서는 인간의 갈등으로 인해 피해를 보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동물과 환경의 입장을 보여주며 '약자'의 존재를 확장한다. 같이 키우던 반려 고양이를 서로에게 떠넘기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커플의 싸움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양이의 의견은 묵살당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고양이에 연민을 가지게 되지만 영화의 상황일 때 선뜻 나서서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한다. 거창한 프로포즈 이벤트를 준비한 남자친구에게 여자는 결혼을 결심하기 어려운 갖가지 이유를 댄다. 여성으로서 일과 육아 문제, 그리고 남자친구와 맞지 않는 종교 차이까지 내세우는 이 에피소드는 결혼을 앞둔 요즘 젊은 청년들의 문제들을 다루는 듯 하지만, 결국 사랑을 확인한 남녀가 떠난 자리에는 수많은 쓰레기만이 남아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의 갈등으로 인해 조용히 망가지고 있는 환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프로포즈 장소를 대관하고자 대기 중인 무수한 이름들이 계속 인쇄되는 연출을 통해 사람들은 계속해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무시할 것이라고 암시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의 영제는 <CITIZEN PANE>이다. 발음이 유사한 단어(Pane과 Pain)를 활용한 일종의 언어유희인데, 결국 '시민 페인', 시민들의 한 대화를 통해 시민이 시민에 의해 무너지고 소외되고 짓밟히는 그 고통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의미다. 기득권의 싸움, 권력자의 부정의, 사회의 공정이 어떻고 불공정이 어떻고를 떠들 때 철저히 외면당하는 '진짜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영화 속 시민들의 대화에서 오고 가는 말들은 그야말로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차별받은 사람이 권력을 가졌을 때 또 다른 차별을 낳는 모순이, 약자가 약자를 밟아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소시민이 상대적으로 더 약자인 동물과 환경을 무시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담겨 있는 이 말들은 바른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대화 속에서 누가 더 잘못되었다고 탓할 수도 없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중엔 잘못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적인 강자는 없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는 잘잘못을 따지려고 6가지의 대화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사실 대화를 하는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엄연히 따지면 잘못된 것은 사회일 것이다. 영화는 약자들끼리 밀어내게 만든 이 잘못된 사회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연대'임을 보여준다. 영화의 네 번째 에피소드 [진정성 실천편]에서 남성혐오 논란에 휩싸인 반려동물 간식 회사가 사과문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논란에 사과해야 하는 을의 위치인 여자 직원들끼리 갈등한다. '이건 남성 혐오가 아니'라는 여자 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논란의 본질에 의문을 가지지 않던 여자 팀장이 '강아지가 남성 혐오 강아지일리가 없잖아'라고 말하며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잘못됨을 인지하고 '을끼리 웃으며 함께 손을 잡고' 끝나는 것처럼, 날이 선 대화를 거두고 이제는 손을 잡고 진정한 공존을 향해 갈 때다. 기득권을 타파하는 판타지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는 다소 지겨운 소재에서 탈피한 <말이야 바른 말이지>는 가벼운 일상 대화를 통해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연대와 공존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