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케 하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4장 1~14절 (2/13 묵상)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미 사회적 지위와 품격이 있는 지도자들(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이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지도자)과 친분이 있어서 왔는지 모르지만, ‘엿보고 있던 것’을 볼 때, 예수님께 긍정적인 생각으로 한 수 배우고자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물으시지만 잠잠합니다. 수종병 걸린 사람을 고쳐주신 후에 지도자들이 안식일 지키는 기준으로 다시 묻습니다. 우물에 빠진 아들이나 소를 안식일에 건져 냄이 정당하다면, 고통스러운 질병에서 구하는 것은 더욱 정당하지 않느냐 하십니다. 예수님의 정당한 율법 적용에 지도자들이 아무런 반박을 못합니다.
예수님은 지도자들이 높은 자리에 앉은 것을 보시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자리가 맨 끝에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상석에 앉은 지도자들은 스스로 ‘우월하다’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율법도 잘 알고 기도, 헌금, 구제도 잘하고 나이도 지긋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 하시며 청함을 받을 때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잔치를 베풀 때도 되갚을 능력이 없는 자, 소외된 자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참된 자도자는 어떤 자인가 말씀하십니다. 첫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법(안식일)보다 한 영혼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높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자리를 피합니다. 셋째, 소외된 자, 약자들과 함께 합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을 초청해서 교제함으로 자신을 과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지도자들은 안식일 규례(법)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책 잡고자 했습니다. 교만하여 상석에 앉고자 하였습니다. 한자리하는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자신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 규례(법)의 본질에 따라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소외된 자들과 늘 함께 하시며 친구가 되어주셨으며,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직분을 맡지 않아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누군가 장난스럽게 ‘장로’와 ‘장노’를 구별하여, ‘장로’는 교회 어른이고 ‘장노’는 은퇴하여 ‘장기적으로 노는 어른’이랍니다. 강원국은 김대중 대통령과 3년, 노무현 대통령과 5년을 청와대에서 함께하며 어른(지도자)의 품격(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강원국의 어른답게 말합니다”란 책의 서문에 있는 글입니다.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시대다. …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어른이 필요하다.”
나를 돌아봅니다. 30대에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어느덧 40년이 지나, 원치 않게 어른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어른다운 어른으로 성숙하지 못한 것, 교만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겸손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얼마나 교만한 자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교만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번주에 우리집 온수 배관이 터져 아랫집 아주머니의 왕짜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질도 넉넉하고 육신도 건강하고 집도 자녀들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얼마나 교만할까. 하지만 사도 바울에게 육신의 가시를 주셔서 스스로 교만하지 않도록 하셨던 주님께서, 저에게도 이런저런 문제들을 주셔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도하심을 깨닫고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