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검진을 위해 따라간 안과에서, 나도 혹시나 하며 간단한 검사를 해 보았다. 그런데 병원 측에서는 남편이 아니라, 나의 검사 상에 이상 소견이 보인다고 했고, 대학병원으로 가라면서 갑자기 의뢰서를 적어주는 것이었다. 의뢰서에는 전부 전문용어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 무슨 병명이 적혀 있는지는 모르겠고, 일단 최대한 빨리는 가야겠다 싶어 뒷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대학병원은 예약 없이는 진료가 쉽지 않아, 대기실에 앉아 무작정 내 이름을 부르기만 기다렸다.
점심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있던 나는,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기다린 탓에 몸도 너무 피곤하고, 눈까지도 지쳐 버렸지만 별 일이야 있겠나 하며 검사실로 향했다.
그리고 검사 결과가 나오기를 또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서 듣게 된 대학병원 안과 교수님의 질문은 충격적이었다.
"혹시 가족 중에 앞을 못 보시는 분이 계십니까?"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대답했다.
"에이. 당연히 없죠."
그래도 교수님은 잘 생각해 보라고 하신다.
지금 잘 모르겠다면 가족력에 의해서 발병되는 병이니, 집에 가서 부모님께도 한번 여쭤보라고도 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일단 얘기나 계속 들어보자 싶어 귀를 기울였더니, 다시 내게 질문하셨다.
"혹시 길을 가다 잘 부딪히지는 않습니까?"
나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는데요. 음... 대신에 밤에는 어두워서 다니기 좀 쉽지는 않아요."
그러자 교수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하셨다.
"혹시 길을 가다 잘 부딪히지는 않습니까?"
나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는데요. 음... 대신에 밤에는 어두워서 다니기 좀 쉽지는 않아요."
그러자 교수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하셨다.
"이 병의 초기 증상이 야맹증인데요, 만약 가족력이 아니라면 약 부작용일 수도 있는데 지금 복용하는 약이 있습니까?"
"얼마 전까지 류마티스 관절염 약을 먹다가 최근에 약을 끊기는 했어요. 별로 안 아파서.., 그래도 한 10년 동안은 약을 먹긴 했죠."
그러자 교수님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럼 해당 병원으로 가셔서 처방전에 '00000 0000'이 들어 있었는지를 한 번 확인해 보세요.(약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집에 가시면 인터넷으로 '망막 색소 상피증'이라는 병에 대해서도 검색해 보세요."
검사용 안약이 눈에 남아 있어, 눈의 초점이 잡히지 않아 그 자리에서 인터넷 검색이 힘들었던 나는, 일단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그게 무슨 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오진일 거야.'
교수님의 심각한 말투에 약간 걱정은 됐지만, 의사들은 원래 겁부터 주는 사람이라며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에 가서 피곤에 지친 몸을 뉘었다. 인터넷으로 해당 병명을 검색했지만, 나는 그 병이 아닐 거라 생각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는 이튿날 류마티스 내과로 향했다.
대기실에서 접수를 하면서 간호사님께 혹시나 그동안의 약 처방에 00000 0000 성분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간호사님은 약간 난처해하면서 의사 선생님께 직접 여쭤보라고 말하며 진료실로 나를 안내했다.
진료실로 들어간 나는 다짜고짜 의사 선생님께 내 약 처방전에 00000 0000이 처방되어 있었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해 주셨다.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아뿔싸!'
대학병원의 검사가 오진이길 바랐다. 내가 먹었던 류마티스 약에도 그 성분이 안 들어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설마 했던 나의 희망은 무참이 깨져 버렸다.
그 길로 대학병원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리고 10년 동안 그 약을 먹은 게 맞다고 알렸다.
그랬더니, 대학 병원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유전성이 아닌,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망막 색소 상피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겠습니다."
교수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병명을 설명했다.
"망막 색소 상피증, 이 병은 망막의 시야가 점점 좁아지면서 결국에는 실명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사람에 따라서 진행 속도가 달라서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몇 년도 못 가서 실명에 이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70이 훨씬 넘어도 시력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내 나이 50이니 아직 20년 동안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안심하던 나에게, 교수님은 나쁜 소식 한 가지를 전해주셨다.
"하지만 현대 의학으로는 아직 치료법이 없습니다."
완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약을 끊었기 때문에 괜찮은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교수님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약을 안 먹는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라, 진행성 병증이라 최대한 속도를 늦추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자외선을 최대한 차단하고 루테인을 매일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겠죠."
병명을 확정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걱정이 다 들었다.
제일 처음 떠오른 건 아이들이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해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무엇보다 먼저 앞섰다.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변해갈 아이들의 모습을 내 눈으로는 직접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가슴을 아리게 했다.
'성인이 된 아이들의 모습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손으로 더듬어 본다면 그 모습 하나하나를 그대로 느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앞을 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극한 상황에서도 나보다는 아이들 걱정부터 하다니, 엄마라는 존재들은 참 어쩔 수 없다고도 싶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걱정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앞이 안 보인다는 건 어느 정도인 걸까?'
'세상이 온통 까맣게만 보이는 걸까, 아니면 모두 새하얗게만 보이는 걸까?'
안 보이게 될 걸 대비해서 미리 연습이라도 해 봐야겠다 싶었다.
집에 도착해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눈을 뜨지 않고 집안을 한 번 걸어 보았다.
그런데 걸을 때마다 벽에 부딪혔다가, 식탁 의자에 걸렸 넘어졌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뭔가 손에 닿이지 않는다면 불안해서 한 걸음 떼기 조차 너무 힘들었다.
'집 안에서 움직이는 것도 이리 힘든데, 혼자서 밖에 나가는 건 또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일일까?'
이래저래 속상했다.
'시각장애인용 흰 지팡이라도 짚고 다녀야 하나?'
아직 노인도 아닌 내가 앞이 안 보인다고 흰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는 상상을 하니 우습기까지 했다.
이렇게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며, 내 신세에 대해서도, 나 때문에 힘들어질 남편과 아이들에 대해서도 걱정을 이어갔다. 슬퍼도 했다가, 우스워도 했다가 하며 그날 하루를 다 보내 버렸다.
그리고는 인스타그램에 해당 병명을 진단받았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랬더니 많은 팔로워분들께서 힘내라고 응원해 주시고, 주변에도 그 병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는 글들도 남겨 주셨다. 그분들께는 감사의 뜻을 전하고 당분간은 눈 보호를 위해서 인스타그램을 잠시 쉬겠다는 글도 올렸다.
이후 매일 열심히 들락거리던 인스타그램도 쉬면서 일상으로 돌아가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에 대한 걱정을 잊고 있었다. 이 병은 바로 표가 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인지 생활하면서 당장에 큰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을 진단받고 난 이후로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노안으로 인한 시력 저하와 야맹증 말고는 아직 큰 이상은 못 느끼고 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실명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실의에만 빠져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병을 진단받고 난 뒤, 해당 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글을 많이 찾아보았다.
그중에는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 또한 생긴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는 병이 빠르게 진행되어 몸으로 느끼다 보니 마음마저 불안해진 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 또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을 마음 편히 즐기고자 매일매일 최면을 걸어보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가능하다면 그런 일조차도 안 생기면 더욱 좋겠지만, 볼 수 있는 동안은 최대한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말만 하려고 한다.
TV를 잘 보는 편은 아니지만, 켜져 있는 뉴스를 보다가도 안 좋은 소식이 나오면 바로 틀어 버린다.
TV를 본다 해도 기껏 해봤자, 보기만 해도 바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예능 프로, 아니면 귀여운 동물 프로 정도나 본다.
그럴 때가 아니라면 책을 읽는다. 읽었을 때 힘이 되어주는 책 위주로.
만약 전혀 예상지도 못했던 이런 터닝포인트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한 번씩 치밀어 오르는 부정적인 생각과 언어들로 나는 나 자신을 괴롭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오늘도 잘 볼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마음과 몸의 상처로 인해 살아나가고자 하는 힘을 잃었다면, 그저 주저앉아 울고 있지만은 않길 바란다. 삶은 여전히 도전과 극복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서 분명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아직은 내가 숨을 쉬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자.
나 또한 언젠가 시야가 닫히더라도, 오늘 볼 수 있는 이 세상과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이 순간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